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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미국의 슈퍼히어로 만화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슈퍼맨과 배트맨인데, 지난 수년 사이 비록 최근작 위주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서가 다수 간행되어 그 위세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1939년에 첫 등장했으니 슈퍼맨과 함께 80년이 넘도록 오랜 인기를 누린 시리즈이며, 오랜 이력에 걸맞게 방대한 작품군을 통해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져 왔다.


슈퍼히어로물에서는 주인공 못지않게 악당이 중요한데, 그중 일부는 반복 등장하는 과정에서 독특한 개성을 부여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슈퍼맨의 숙적인 렉스 루터와 배트맨의 숙적인 조커이다. 특히 조커는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에서 묘사된 탄생 비화를 통해 단순한 범죄자에서 광기와 비애를 모두 지닌 인상적인 인물로 재해석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물론 배트맨의 입장에서야 조커는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일 뿐이다. 살인은 기본이고 다양한 범죄를 일삼는데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배트맨의 여러 지인에게도 갖가지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트맨은 매번 주먹으로 응징하는 선에서 그치고, 설령 살의를 느꼈을 때조차도 고든 경찰청장 등 주변인의 만류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고든은 번번이 "우리 식대로" 해야, 즉 법에 의거해 처벌해야 마땅하다는 이유를 내놓지만, 실상은 악순환의 반복일 뿐이다. 조커는 법정에서 정신 이상을 호소하여 아캄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머지않아 탈주하여 범죄를 저지르다 배트맨에게 제압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만화의 전개를 위한 설정이니 과도한 몰입은 곤란하지만, 어쩐지 현실의 딜레마와도 유사하다.


쉽게 말해 악당은 법을 안 지켜도 그만이지만, 경찰은 법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는 역설이라 하겠다. <더티 해리>에서 악당이 여론을 이용해 경찰에게 큰소리치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 영화에서처럼 무작정 인권만 앞세운다면 범죄 단속이 가능할지도 의문이기는 하다. 그러니 큰 사건마다 단속 강화, 중형 선고, 사형 부활 등의 여론이 비등하는 게 아닐까.


현직 대통령의 탄핵 심판에서도 이런 딜레마가 드러났다. 자신은 비상 계엄 등 불법적인 행동을 줄줄이 해 놓고, 막상 심판과 수사의 대상이 되자 절차의 정당성을 따지기 때문이다. 똑같은 위선자가 될 수 없으니 담당 기관마다 최대한 법률과 절차를 준수하려 노력한다지만, 대통령 지지자들은 사소한 일까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니 피로만 쌓여갈 뿐이다.


이쯤 되니 아무리 조커를 응징해도 전혀 끝을 볼 수 없는 배트맨이 느낄 절망감과 암담함이 실감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조커는 아무리 범죄를 저질러도 법적 보호를 받는 반면, 배트맨은 아무리 범죄를 응징해도 자경단이라는 특성상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니 사실상 입장이 역전된 셈이다. 결국 둘 중 누구 하나가 먼저 쓰러진다면 십중팔구 배트맨 쪽이 아닐까.


만화가들도 이런 역설을 인식한 까닭인지, 최근작 중에는 아예 배트맨이 악당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고 가정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여러 숙적들이 내놓는 '배트맨의 최후 목격담'을 엮은 것도 나왔다. 심지어 조커와 투페이스 같은 악당뿐만 아니라 앨프리드 같은 측근까지도 배트맨의 최후를 저마다 다르게 서술하기 때문에 '배트맨판 <라쇼몽>'이 되어 버린다.


무려 닐 게이먼이 스토리를 맡은 <망토 두른 십자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가 바로 그 작품인데, 다시 찾아보니 황당하게도 저 소설가가 작년에 여러 건의 성범죄 혐의로 고발당했다 한다. 급기야 작품 출간이며 영상화 계획이 줄줄이 취소되며 손절당하는 상황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쩐지 픽션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의문의 1패'인 배트맨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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