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대체 뭘 검색하다 그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여하간 지난 주에 우연히 국어학자 강신항 교수의 타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어학보다 문학에 관심 많은 나귀님이다 보니 고인의 저서는 사실상 갖고 있지 않아야 맞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너덧 권쯤 갖고 있다. 다만 학술서는 옛날 역학(譯學)에 대한 것뿐이고, 나머지 몇 권은 에세이와 일기일 뿐이다.
지난번에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 이야기를 하면서 강신항의 가족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 그 부인 정양완 교수가 바로 그 책을 최초로 국역했었기 때문이다. 부부 모두가 학자이고 자녀 중에도 학자가 나왔으며, 특히 정양완의 부친이 위당 정인보이니 바야흐로 대학자의 가문이라 할 법한데, 아들인 수학자 강석진의 성추문으로 먹칠을 당하고 말았다.
"강신항, 정양완의 가정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숲마을에서 배밭골까지>(2000)라는 문집의 서문을 보니, 무려 1973년부터 부부 공동 문집을 간행하기 시작해서 무려 다섯 권을 간행했다고 나온다. 2000년에 나온 책에서는 부부의 글뿐만 아니라 아예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가 쓴 글까지 한데 모아서 가족 문집을 만들어 놓았다.(강석진의 글도 있다!)
예전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이었는데, 저자나 그 가족에 대한 내용보다는 에세이 속에 언급된 여러 인물들에 대한 회고가 흥미로워 보여 구입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스승인 이희승, 이숭녕, 남광우, 이병기, 정병욱 등 국어국문학계의 거물들에 대한 일화뿐만 아니라, <역사 앞에서>의 저자인 김성칠에 대한 회고와 추모의 글도 수록되어서 흥미로웠다.
김성칠의 아들 김기협이 쓴 <아흔 개의 봄>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김성칠의 부인인 이남덕이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사이에도 남편의 옛 제자가 문병을 오자 한눈에 알아보더라는 흥미로운 일화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강신항이, 네가 어쩐 일이냐!"라며 이름까지 들먹인 사모님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고 묘사되었던 그 제자가 바로 강신항이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김성칠은 육이오 중에 고향인 경북 영천에서 피살되었는데, 전쟁과는 무관히 어느 정신이상자의 범행에 당한 것이라 하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 앞에서>는 김성칠이 광복 직후부터 사망 직전까지 작성한 수년간의 일기를 부인 이남덕과 아들 김기협이 정리해 간행한 것인데, 제자 강신항도 발문 가운데 하나를 작성했던 것으로 나온다.
흥미로운 점은 강신항도 육이오 즈음 작성한 일기를 <어느 국어학도의 젊은 날>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학생 신분이었던 저자도 징집 대상이었지만, 마침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던 스승 김성칠의 배려로 연구 보조원이 되어 후방에서 근무했다 전한다. 물론 일기를 보면 매일같이 장교들의 폭언과 멸시 속에 꽤나 힘들게 지냈다지만.
날짜 순서가 아니라 일단 소년 시절, 학창 시절, 대학 시절, 군대 시절, 연애(?) 시절 등 큰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나서 다시 날짜 순서로 배열했기 때문에 순서가 오락가락한 감은 있고, 20대 초의 청년 시절이기 때문에 견문이나 정보가 폭넓지는 못하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지만, 저 어두운 시기의 한국 사회의 한 부분을 조명한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강신항보다 5년 연하인 유종호도 육이오 당시 미군 부대에서 사환으로 일했던 경험을 <그 겨울 그리고 가을>이라는 회고록에서 서술한 바 있었다. 나귀님은 어린 시절 받은 반공 교육에 대한 반발심 때문인지 성인이 되어서는 육이오 관련 서적을 의도적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극한 상황 속에서 벌어졌던 놀라운 이야기가 많아서 신기했다.
예를 들어 지금 세대는 영화 <기생충>의 '한 지붕 세 가족'(?) 설정을 기발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포탄이 날아다니고 시체가 널렸던 시절의 현실은 상상을 거뜬히 능가한다. 나영균의 회고에 따르면 육이오 당시에 갑자기 인민군이 집을 몰수하는 바람에, 천장 위에 숨어 살던 남편이 내려오지 못한 채 일주일 넘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버텨야 했다니까.
그러고 보니 지식산업사에서 나온 <6.25 일지>라는 책도 있었으니, 다시 꺼내서 나란히 놓고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그 저자 박찬웅의 부친이 국문학자라서 <훈민정음>을 소장하다 최남선에게 넘겼다는 기록이 있던데, 마침 강신항도 <훈민정음> 연구로 유명하니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인 셈이다. 그나저나 그 책을 도대체 어디 두었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