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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작년 가을에 현역 장교가 내연 관계인 여성 군무원을 살해하며 벌어진 이른바 '화천군 북한강 토막 살인 사건'이 밝혀져서 한창 떠들썩했었다. 그런데 마침 가해자인 양광준의 얼굴이 공개되자, 이를 보도한 어느 뉴스의 아나운서가 대뜸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얼굴만 봐서는 흉악스럽게 생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걸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롬브로소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얼마 전에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 범죄인>을 꺼내서 훑어본 다음이고 보니, 범죄자의 외모와 그 범죄성의 관계를 언급한 뉴스 아나운서의 발언에 문득 저 근대 이탈리아의 범죄학자가 심어 놓은 대중적 선입견이 얼마나 지속적인지를 깨닫게 된 까닭이었다.


체사레 롬브로소(1835-1909)는 '범죄학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다. 그 이론의 핵심은 '태생적 범죄자'이다. 즉 범죄란 문명에 반대되는 원시적 행위이며, 범죄자란 원시적 악덕이 격세유전으로 발현된 사례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범죄가 의도적이므로 엄벌하자는 베카리아의 주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범죄자의 선처를 호소한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롬브로소의 범죄학은 그 방법에서 여러 가지 허술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당대부터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범죄인>은 영어판 편역본을 재번역한 것인데, 영어판 편역자는 롬브로소의 사상이 왜곡되고 오해되었다고 항변하면서, 이 저자가 19세기의 통념을 답습한 동시에 혜안도 보여준 부분에 주목하자고 권유한다.


물론 롬브로소의 범죄학이 역사적으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과학적 범죄인류학'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오늘날에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봐야 맞을 듯하다. 비록 진화론과 인류학 같은 나름 과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긴 했지만 주먹구구식에 불과하며, 애초 장담과 달리 과학적이지도 엄밀하지도 못한 주관적 해석이 많기 때문이다.


롬브로소의 이론에서 가장 악명 높은 대목은 골상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귀가 커서 도드라지는 것'을 범죄자의 특성으로 간주하는 식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저서인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사이비 과학인 사회적 진화론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물론 롬브로소의 영어판 편역자들은 굴드가 왜곡했다고 주장하지만).


주저인 <범죄인의 탄생>(1867)만 해도 범죄자는 열등한 존재라는 전제로 시작하며, 자매편인 <여성범죄인>(1893) 역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따라서 롬브로소의 저술 역시 예를 들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관련 저술처럼 그저 개척자로서의 의의와 역사적인 가치만 지닐 뿐,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기는 불가능한 내용이다.


다만 그 이론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근대 범죄학의 창시자로서 롬브로소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사람의 외모와 범죄 성향의 관련성을 은연중 떠올리게 되는 버릇이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악역 전문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서 반복되고 강화되면서 강아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범죄의 유전적 소질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지만, 자칫 범죄로 이어지기 쉬운 과격한 성격 같은 경우에는 집안 내력의 영향도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여기에 에드워드 O. 윌슨이 개척한 사회생물학의 결론 같은 것을 감안하면 마치 롬브로소의 이론이 현대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보이지만, 설령 방향이 얼추 맞더라도 '범죄인' 이론은 사이비 과학일 뿐이다.


오늘날에 와서 롬브로소의 기여를 굳이 찾자면 사상 최초로 범죄라는 사회 현상을 과학과 통계 같은 체계적인 방법으로 분석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정작 그 창시자 본인의 실제 행동이 그리 엄밀하지 못한 까닭에 그 주장 자체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반면에 외모와 범죄의 연관성 같은 대중의 편견만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아쉽다고 하겠다.


물론 외모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편견임을 알더라도 막상 떨치기는 어려운데, 어떤 면에서는 롬브로소가 조장한 이런 편견이 꽤나 보편적 편견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레스코프의 소설 <괴물 셀리반>이 멋진 반박을 제공하고 있지만,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레스코프의 교훈보다는 롬브로소의 이론을 따라 살아가는 듯하다.


그나저나 철 지난 롬브로소의 이론을 오늘 다시 되새겨본 까닭은 며칠 전 대전에서 일어난 현직 교사의 초등학생 살해 사건 때문이다. 사건의 성격이나 잔혹성 모두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보니 크게 공분이 일어난 상황인데, 어쩌면 사건의 여파나 국민적 관심의 정도를 감안해서라도 조만간 가해자의 얼굴과 실명 등 인적사항이 공개되지 않을까 짐작해 보게 된다.


만약 얼굴이 공개되면 십중팔구 롬브로소의 유산인 외모와 범죄성에 대한 언급도 여기저기서 뒤따라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멀끔하지 못한 외모에서부터 범죄성이 농후했었다는 비난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이와는 정반대로 멀끔한 외모 뒤에 범죄성을 숨기고 있었으니 가증스럽다는 비난이 나올 수도 있을 법하다. 물론 어느 쪽이든 간에 근거는 없는 이야기겠지만...



[*] 기억을 더듬어 보니, 롬브로소의 저서는 1970년대에 나온 을유문화사의 (세로쓰기) 세계사상전집 가운데 한 권에 수록된 <천재론>을 읽은 것이 처음이었다.(이건 지금도 새로운 번역본이 간행된 듯하다).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 범죄인>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법사학자들이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발췌해서 편역한 영역본을 재번역한 것이다. 편역자들은 롬브로소의 저서가 이전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영어권에 소개된 적이 없으며, 그로 인해 오해와 왜곡이 벌어졌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새로운 영역본 편역서에서는 롬브로소의 주장을 온전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평하지만, 사실 이것도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오늘날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이나 중언부언 산만한 부분은 모두 걸러낸 편집본인 한에는 원저자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온전히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려울 법하다. 여하간 의의도 있지만 한계도 뚜렷한 롬브로소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도 오래 전에 사다 놓은 것이 있으니 다시 꺼내 뒤져 보아야 하는데 귀찮...


[**] 글을 올리면서 보니 <범죄인의 탄생>의 또 다른 번역본도 <태생적 범죄자>라는 제목으로 나온 모양인데, 알라딘 서지정보에는 관련 소개 내용이 부족한 까닭에 어떤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다만 저자명부터 "롬브로소 체세레"라고 쓴 것을 보면 그리 신뢰할 만한 번역본까지는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이런 나귀님의 태도 역시 외모와 범죄성에 대한 저 범죄학자의 유산처럼 편견에 불과하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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