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먹으면서 NBC 뉴스를 보는데, 미국의 어느 학교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판정에 불복하며 링크에 뛰어나가 학생 심판을 밀친 막장 학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자 바깥양반이 휴대전화로 뭘 검색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밀치다'(shove)라는 단어가 있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네."
언어 덕후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어 애호가쯤은 되는 바깥양반이고, 특히 영어를 잘 해서 중학교 때부터 동급생을 상대로 과외를 해서 짭짤한 수입을 올렸고 (하지만 엄마한테 다 빼앗겼다!) 대학 시절 내내 생계 수단이었을 정도인데, 가끔은 터무니없이 쉬운 단어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
한 번은 "메기"(catfish)를 보고는 저게 뭐냐고 묻기에, 톰과 헉이 낚시로 즐겨 잡은 물고기 아니냐고 대답해 주었더니만 처음 보는 단어란다. 물론 나귀님도 항상 다 알진 못하니 한 번은 바트 심슨이 칠판에 쓴 "광합성"(photosynthesis)이라는 단어를 "사진 합성"으로 오해한 바 있다.
이런 무지나 오해가 발생하는 까닭은 당연히 영어가 모국어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각자의 분야며 기호에서는 자주 접할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어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니, 누구나 모르는 말이 있고, 또 의미를 잘못 아는 말이 있다.
즉 언어란 것은 아무리 알아도 다 아는 게 아니다. 자칭 언어 학습 권위자들은 완벽이니 정복이라는 말을 종종 입에 올리지만, 그게 말이 쉽지 과연 현실에서 가능할까. 아무리 공부해도 모르는 단어가 있고, 아무리 책을 읽어도 모르는 내용이 있고, 알던 것도 곧잘 잊어버리게 마련인데.
그러고 보니 최근 나온 책 중에 일본인 히키코모리가 인터넷으로 루마니아어를 독학해 현지에서 작가로 등단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알라딘에서 '루마니아어'나 '루마니아'로 검색해 보아도 나오지 않으니, 뭔가 제목이나 부제에라도 그 나라 이름을 넣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구글링해 보니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라는 책인데, 지난번에 잠깐 언급한 노라 에프런의 일화에서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 제목'으로 꼽힌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의'(of)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어떤 영화 제목(지금도 기억이 안 난다!)만큼이나 기억에 남지 않는 제목이다.
물론 루마니아에 대해서라면 그곳 출신 저자의 책 몇 권을 읽은 것이 전부인 나귀님이지만, 언젠가 듀이 십진분류법에서 언어(400) 분야의 하위 분류에 루마니아어가 영어(420), 독일어(430), 프랑스어(440), 스페인/포르투갈어(460)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을 보고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동유럽의 올망졸망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인구나 영향력도 많지 않은 루마니아인데, 어째서 언어는 이렇게 중시되는 걸까? 알고 보니 루마니아어가 슬라브어보다는 로망스어에 가깝다 보니, 19세기 유럽중심주의의 산물인 듀이 십진분류법에서 이탈리아/루마니아어(450)로 분류된 것이다.
반면 유럽의 대표 언어 예닐곱 가지 이외의 모든 언어를 '다른 기타 언어'(490)로 몰아넣어서 지금 현실에는 안 맞다 보니, 이제는 나라마다 수정판 십진분류법을 사용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국 십진분류법에서는 언어(700) 분야의 이탈리아어(780) 항목에 루마니아어(789)가 들어가 있다.
인터넷 시대가 되니 언어 학습의 방법도 달라져서, 지금은 한국 드라마나 가요에 심취한 끝에 한국어 능력자가 되었다는 외국인도 많이 나오니 신기한 일이다. 물론 예전에도 미국 팝송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매료되어 영어와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된 '덕후'들이 적지 않았었지만.
바깥양반도 언어 애호가라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배우기는 한 모양이고, 그중에서도 라틴어와 일본어와 독일어는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독학했던 모양이다. 나귀님도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문법책이나, 콥트어와 우가릿어 사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기심일 뿐이다.
하지만 때로는 어학 능력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 번은 바깥양반이 어떤 독일어 텍스트를 읽으면서 사전에도 없는 이상한 단어가 나온다며 투덜거리기에 흘끗 보니 "Brechts Svejk"였다. "브레히트가 각색한 <병사 슈베이크>"를 말하는 것 아니겠냐니까 "깜놀"하더라는.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이스라엘 셰플러의 <하버드 대학의 학자들>에 나오는 고전학자 해리 울프슨의 일화다. 갓 입학한 대학원생이 찾아와서 이러저러한 논문을 쓰고 싶다고 말하자, 반색하며 자기가 가진 책을 꺼내 건네면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자네, 페니키아어는 할 줄 알겠지?"
민음사의 번역본은 워낙 오역투성이라서 추천할 수 없지만, 울프슨의 인품과 학식을 보여주는 일화만큼은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연구로 유명했던 이 학자의 업적도 지금은 구닥다리라 거의 잊히고 말았다니, 학문의 세계 역시 언어의 세계처럼 얼마나 넓디넓은 것인가!
그러고 보니 최근 이집트 상형문자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책도 나왔던데, 한때 <람세스>라는 소설의 인기 덕분에 이집트 관련서가 우후죽순으로 나오면서 (지금은 다 절판되었지만) 덩달아 상형문자에 관한 책도 몇 권 나왔었다. 지금은 전공자도 생겼다니 관련서도 더 늘어나지 않을까.
이집트 상형문자라고 하니, 예전에 단골 헌책방 사장님에게 들은 한 가지 기막힌 사연도 생각난다. 예전의 단골 손님 중에 중년의 언어 덕후가 있어서 언어에 대한 외국 서적이 나오면 반색하며 구입했는데, 그 손님이 가장 애타게 찾던 것이 영어로 된 이집트 상형문자 문법책이었다고 한다.
급기야 제목과 저자 이름까지 적어서 건네주며, 얼마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꼭 구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나. 헌책방 사장님의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책을 무작정 구해 달라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그냥 알았다고만 하셨는데, 나중에 진짜로 그 책이 나왔다!
하지만 그 언어 덕후 손님은 안타깝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다음이라, 그토록 찾던 책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마땅한 임자도 없는 책이 되고 말았지만, 그 사연이 참으로 딱하고 기막히다 보니 헌책방 사장님도 그 상형문자 책을 차마 팔지 못하고 갖고 계셨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평소 앉아 계시던 책상 밑으로 손을 넣어 낡고 두툼한 책을 꺼내 보여주셨는데, 한 눈에도 반세기 이상은 묵은 것처럼 보이는 느낌이었다.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이니 사진으로 남기지도 못했는데, 제목이라도 적어 놓을 것을 그랬나 싶어 아쉽기도 하다.
헌책방을 하다 보면 책과 사람의 인연을 숙고하게 된다고 종종 말씀하셨던 사장님이신데, 지금은 아쉽게도 가게 운영을 그만 두시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이집트 상형문자 문법책은 어떻게 되었는지 가끔 궁금한 생각도 든다. 물론 알라딘 중고 매장에서였다면 당연히 매입 불가였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