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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대통령 탄핵 재판이 진행되면서 슬금슬금 흘러나오는 여당의 차기 대권 주자 관련 뉴스 중에는 한동훈에 관한 것도 있었다. 비상 계엄 해제 직후 총리와 함께 국정을 책임진다며 나섰다가 안팎에서 주제넘은 짓이라며 몰매를 맞고 결국 여당 대표를 사임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잠깐이나마 정치의 맛을 보니 일말의 미련이 남았는지 또다시 움찔거리는 모양이다.


윤석열도 마찬가지였지만 한동훈도 자의보다는 타의로 정치판에 뛰어든 경우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기회가 생기자마자 선뜻 뛰어든 것을 보면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차라리 두 사람 모두 칼잡이 노릇만 했다면 평생 행복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양쪽 모두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이라고는 없는 상태에서 등장해서 이 사달이 난 셈이니까.


비상 계엄 직후 여러 매체에서 쏟아낸 전문가 의견 중에는 당연히 한국 정치의 '스타 등용'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문자 그대로 자기 분야에서 명성을 쌓아 대중적 인기가 높은 유명 인사를 섭외하여 정치계에 입문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한 나라의 영웅이고 한 분야의 스타인 사람을 영입했더라도 정치는 또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 문제다.


제아무리 '야합'이라는 비판을 듣더라도 어찌저찌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라면, 학문이나 스포츠처럼 정답이나 승패가 확실한 분야에서 활동했던 사람의 성격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 이른바 스포츠 분야에서 스타 출신 지도자가 드문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닐까. 뛰어난 운동 능력이 뛰어난 지도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정치력도 마찬가지이리라.


아무리 한 분야의 스타라도 국회에 입성하면 300명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며, 종종 본인의 의견보다는 정당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때 돌풍의 주역이었던 안철수도 국회의원이 되고나서부터는 존재감이 약해지고 말았으며,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만능까지는 아니라는 점이 윤석열의 임기 내내 반복해서 드러났었으니까.


윤석열의 행보를 보면 검찰 출신 정치인의 문제는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은데, 이는 한동훈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특히 한동훈은 모범생 같은 이미지가 오히려 역효과를 자아낸 것도 같다. 제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도 명백한 모순까지 덮지는 못하고 종종 자가당착을 범했으니, 정치에는 수능처럼 정답이 없다는 점을 망각한 것은 아닐지.


그러고 보니 한동훈은 한때 책 선물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2023년 12월에 법무부 장관을 그만 두고 여당 비대위원장이 되었을 때, 어느 고등학생에게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선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갑자기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현상까지도 벌어졌다. 심지어 반년 뒤인 2024년 6월에도 어느 중학생을 만나서 똑같은 책을 선물했다고 전한다.


왜 하필 <모비 딕>인가? 관련 보도에 따르면 평소에도 각별히 감명 깊게 읽은 책이라고 언급했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감명을 받았을까? 본인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관련 보도에서는 그 소설에 대한 흔한 이해대로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전념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모비 딕>이 단순히 '고래를 잡으려는 선장의 집념'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모한 목표를 위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까지 희생시키려는 광기'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좋게 말하면 집념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집에 사로잡힌 선장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하나로 똘똘 뭉친 피쿼드호야말로 죽음조차 불사하는 광신도 집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포경선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은 사람이 1등 항해사인 스타벅인데, 냉정과 상식을 보유한 까닭에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점을 실감하면서도 속수무책이라 전전긍긍한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한동훈의 처지가 딱 스타벅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2023년 말에는 사태를 낙관했을지 몰라도, 2024년 중반에는 전전긍긍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똑같은 <모비 딕> 선물이라 하더라도, 2023년과 2024년의 심정은 서로 달랐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선장을 충실히 보좌하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점차 광기로 치닫는 모습을 지켜보며 불안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항해사로서 선장을 설득하지도, 아예 하선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비상 계엄 직후에야 역풍을 맞고서 쓸쓸히 물러나고 말았다.


그렇다면 한동훈은 광기에 사로잡혀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 한 스타벅이 아니라, 동료의 관짝을 붙잡고 목숨을 부지하여 '나만 홀로 살아남아 고하러 왔소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이스마엘이었던 것일까. 본인도 이런 아이러니를 느끼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모비 딕>을 선물했던 그의 행동이야말로 결국 자기실현적 예언은 아니었을지...




[*] 그나저나 저 고래잡이 소설을 단순히 '푯대를 향한 경주를 경주하고'로만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마치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말[馬]들이 예쁘게 나오더라'고 엉뚱한 소감을 말했다는 어느 미국 보수 정치인과도 비슷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귀님이야 앤 해서웨이의 젖통과 미셸 윌리엄스의 엉덩이가 근사했던 영화로 기억하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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