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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알라딘 북펀드 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아베 코보의 <벽>이 재간행될 예정이라기에 어떤 눈 밝은 출판사인가 궁금해 확인했더니 저놈의 '마르코폴로'라는 출판사였다.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동방견문록> 저자 '마르코 폴로'에 관한 논픽션을 검색했더니만, 엉뚱하게도 이 출판사의 책만 줄줄이 검색되어 짜증이 치밀었다.
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의 이름을 가져다 쓰려면 하다못해 '뿌쉬낀하우스'처럼 살짝 변형이라도 하든가, 다짜고짜 그 이름을 쓰는 건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거다. 그런데 잠시 후에 북펀드 중에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들의 배> 재간행 소식이 있길래 살펴보니, 이건 또 출판사 이름이 '구텐베르크'라고 나온다.
이쯤 되면 요즘에는 출판사 이름 정하는 데에서부터 일찌감치 창의성이 바닥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閣, -館, -院, -堂, -社 등으로 끝나는 옛날 출판사 이름이 훨씬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코폴로'나 '구텐베르크'가 더 개성적이거나 인상적인 이름이라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알라딘에서 '뿌쉬낀'으로 검색하면 '뿌쉬낀하우스'도 덩달아 검색되어 불편하지만 (그런데 '푸시킨'이라고 검색하면 '뿌쉬낀'이라고 표기한 책도 줄줄이 검색되는 반면 '뿌쉬낀하우스'는 검색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쪽은 러시아 전문 출판사라는 정체성에 어울리는 반면, '마르코폴로'와 '구텐베르크'는 그런 것조차 아닌 듯하다.
이건 아동서 전집 출판사인 한국톨스토이, 한국헤르만헤세, 한국셰익스피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도대체 그 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책과 그 출판사의 이름에 들어간 작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일 수밖에 없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흠좀무'한 사실은 이 세 출판사가 사실은 똑같은 회사의 계열사인지 브랜드라는 점이다.
결국 '마르코폴로'건 '구텐베르크'건 '한국톨스토이'건 '한국헤르만헤세'건 '한국셰익스피어'건 간에, 해당 인물의 사상이나 유산과는 무관하게 그저 명성만을 차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물론 '까치'도 조류 책만 내는 것까진 아니고, '동문선'도 한국 문학만 내는 것까진 아니지 않느냐고 반박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그나저나 유명인의 이름을 출판사의 이름으로 차용하는 지금과 같은 풍조가 계속될 경우, 나중에 가서는 '한국보리스파스테르나크'나, '한국스베틀라나알렉시예비치'나, '한국장마리귀스타브르클레지오'나, '한국토마스트란스트뢰메르'도 나올 법하다. 당연히 '한강'이나 '한국한강'이나 '노벨한강'은 거의 기정 사실처럼 보이고...
[*] 안부공방 이야기를 하려다가 얼떨결에 출판사 이름 이야기만 하다 끝나버렸다. <벽>은 1970년대에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 세로쓰기 전집에 수록된 번역본으로 갖고 있는데, 완역이 아닌가 싶어 어제 다시 꺼내 확인해 보니 "S. 카르마 씨의 범죄"부터 "바벨탑의 너구리"까지 여섯 편이 모두 수록된 완역본이었다. 책장을 뒤적이다 보니 1977년에 나온 신조문고 일어판 <壁>도 한 권 나온다.(나귀님이 안부공방 좋아했네!) 새로 나온다는 책의 번역자는 과거에 <아베 고보 연구>라는 학술서도 내놓았는데, 고유명사 표기 등 기본적인 부분에서 오류가 눈에 띄어 딱히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번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이것밖에 없으니 살 사람은 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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