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나귀님 나귀님 나귀님


그러고 보니 최근 완독한 로알드 달의 회고록 <단독 비행>에서도 동체 착륙 체험기가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에 자원 입대한 저자가 속성 조종사 훈련을 받고 나서 단독 비행으로 임지를 찾아 나서는데, 잘못 전달된 정보 때문에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결국 해질녘이 되어 동체 착륙을 시도하게 된다.


역시나 사막 불시착 체험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발표한 셍텍쥐페리와 유사하게, 로알드 달도 이때의 체험 이후 두뇌가 색다른 자극을 받으면서 창작열이 불타오르게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회고록 말고 전기에 따르면 이야기꾼 특유의 말솜씨로 불시착 체험부터 실제와는 영 딴판으로 윤색한 부분이 적지 않다지만 말이다.


아동서 저자로서 로알드 달의 명성을 감안하면 <단독 비행>도 지금처럼 청소년물로 간행되는 것이 온당해 보이기는 하지만, 부조리 고발 위주인 내용상 솔직히 성인쯤 되어야 제대로 공감할 만하지 않나 싶다. '스핏파이어'를 '스핏파이터'로 오기한 부분 등을 보면, 후반부 공군 복무담에는 '밀덕'의 감수도 필요하지 않았나 싶고.


최인호와 이우범, 또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또는 와다 하루키)의 경우처럼, 로알드 달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사실상 전담 삽화가인 퀜틴 블레이크인데, 마침 알라딘 북펀드에서 이 양반 전기를 간행한다며 한동안 광고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서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결국 간행되기는 간행된 모양이다.


그런데 북펀드 광고에서 살짝 의아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저 삽화가의 또 달라진 이름이었다. 원래 QUENTIN은 "퀜틴"으로 쓰고, 실제 발음도 네이버 사전에는 미국과 영국 공히 "퀜튼"(/ˈkwɛntn/ 또는 /kwéntn/)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번에 간행된 전기의 제목처럼, 이제는 "퀜틴" 대신 "퀸틴"이란 표기가 이미 대세인 듯하다.


사실 QUENTIN이라는 이름은 출판계에서 꽤 오래 전부터 골칫거리로 간주되었다. 컴퓨터가 출판 편집에 도입된 것이 1990년대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완성형 한글에서 "퀜"이라는 표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이제는 외면한다는 아래한글이 대세가 된 까닭도 조합형 한글로 "퀜"과 "뚫훍" 표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출판 편집 프로그램은 조합형이 아니라 완성형만 지원해서, "퀜틴"을 표기하려면 "퀜"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만들어서 본문의 해당 위치에 놓아두어야 했다. 그 와중에 그림 위치가 잘못되어서 글자가 사라지는 문제도 빈번했으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제인에어> 초판에서도 "하얬다"가 "하_다"로 여러 번 잘못 나왔다.


그러다 보니 편의상 고유명사 표기를 바꾸기도 했으니, QUENTIN이라는 이름을 "쿠엔틴"으로 쓰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퀜틴"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표기할 수 있는 지금도 "쿠엔틴 타란티노"와 "퀜틴 스키너"처럼 표기가 제각각이 된 이유는 그래서였다. QUENTIN BLAKE 역시 "퀜틴"과 "퀀틴"과 "퀸틴"까지 출판사마다 제각각이다.


현재 알라딘 국내도서에서 QUENTIN BLAKE로 검색하면 중복 포함 77종이 나오는데, 그중 "퀜틴"은 23종, "퀸틴"은 23종, "퀀틴"은 31종이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살림어린이의 표기법인데, <세계 최고의 동화는 이렇게 탄생했다>에서는 "퀜틴", <단독 비행>에서는 "퀀틴",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에서는 "퀸틴"으로 제멋대로이다.


그래도 달과 블레이크 콤비의 책을 가장 많이 간행한 시공주니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퀜틴"에서 "퀸틴"으로 갈아타는 것이 대세로 보인다. 하지만 사전의 발음과 다르면 잘못 아닌가 싶어 유튜브에서 BBC 뉴스를 들어 보니 진짜 "퀸튼"처럼 들리기도 한다. 결국 사전의 발음 표기보다는 현지 발음을 반영한 결과일까.


그렇다면 한때 "퀜"을 그림 파일로 만들어서 일일이 갖다 붙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출판사 편집자들로서는 살짝 억울할 수도 있겠다. 외국어 표기 원칙이야 어쨌거나 간에, "퀜"을 "퀀"이나 "퀸"으로 (또는 "하얬다"를 "하얗다"로) 살짝 다르게 표기하며 편리하게 작업했어도 굳이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았을 법하니 말이다.


오래 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듯이 처음에는 "알라딘"도 "앓랉딚"이었고, "나귀님"도 "낪궱닋"이었지만 표기가 어려운 까닭에 지금처럼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국가를 운영하는 법과 원칙마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린 지금의 시점에 와서 돌아보면 "퀜"의 표기 하나를 가지고 절절 맸던 과거지사야말로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 국내 최고의 서점 YES24에서 고화질 미리보기로 살펴보니, <퀸틴 블레이크>의 22-23쪽에 나온 <스펙테이터> 표지에 대한 캡션에는 잘못된 부분이 있다. 영어 원서에는 아마 캡션이 없었겠지만 국내 독자의 편의를 위해 집어넣은 듯한데, 각 권의 표지에 나온 특집 기사명을 잘못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8쪽 왼쪽의 표지를 "<롤리타>, 1959"라고만 썼는데, 실제로는 나보코프의 소설이 아니라 "킹즐리 에이미스의 <롤리타> 서평"이 수록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19쪽 아래 오른쪽의 표지를 "소비에트 작가들, 1965"라고만 썼는데, "데즈먼드 스튜어트의 기고문 '소비에트 작가 마을에서'"가 수록되었다는 뜻이다. 특집 기사가 부각된 호도 있고 아닌 호도 있으니 (예를 들어 캡션에서 빠진 19페이지 아래 왼쪽의 표지에서는 <스펙테이터>를 잔뜩 가진 아저씨가 그 호의 기고문 가운데 하나인 "아동서"를 꼬마에게 건네주는 장면을 재치 있게 묘사했다) 차라리 특집 기사가 있는 경우에만 내용을 요약하고, 주간지임을 감안하여 날짜 표기는 "1959년 11월 6일자"와 "1965년 8월 27일자" 등으로 써 주면 어땠을까 싶다. 그나저나 "퀸틴 블레이크 버전 '롤리타'"라니... 지금은 아동서 삽화가로 더 유명하지만, 잡지 표지로 경력을 시작한 퀸틴 블레이크의 폭넓은 활동 반경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화다.(물론 지금쯤 어느 한구석에선가는 '변태 아동성애자 그림쟁이의 책 불매 운동'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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