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후진이 없다. 직진밖에 모르는 초보 운전자다. D-두 자릿수. 정신없이 지내다 확인하니 십의 자리가 확 바뀌어있다. 출퇴근이 반복되는 첫 번째 삶을 마무리하기까지 남은 기간이다. 디데이가 오기는 오는구나. 한동안은 매일 출석 체크하듯 확인해도 그리 더디더니, 두 자리로 줄어든 후로는 능숙한 운전자로 빙의했나 가속이 붙는다. 막연하던 날짜의 존재감이 선명하다.
새로운 근무지로 출근한 작년 3월, 정년퇴직을 당연하게 여기던 초임 시절을 떠올리며 그런대로 견딜 만하면 더 해볼까 생각도 했다. 명예롭게 퇴직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마다 난무하는 고성과 비속어가 귓가를 울릴 때면 조금씩 숨이 막혔다. 나이가 면죄부라도 되는 양 거침없이 휘둘러지는 무례의 칼날은 수시로 심장에 생채기를 냈다. 무의욕을 덮고 엎드려 있는 장면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적막한 교실에서 몇안되는 눈빛에 의지한 채 홀로 울리는 나의 음성을 들을 때면 무기력함이 한기처럼 배어 나왔다.
나를 둘러싼 공간의 질감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긍정의 에너지가 점점 고갈 되어감을 감지한다. 소소한 보람과 보석 같은 웃음들로 치유하며 버티기에는 상처가 생기는 속도가 그보다 빨랐다. 자가 처치의 한계를 절감하다 직원 화장실 거울에서 표정 없는 자화상을 목도한다. 더 이상 이 공간에 나를 두고 싶지 않아. 첫 번째 삶을 마무리할 결심을 굳힌 날, 제일 먼저 카카오톡 프로필에 디데이를 설정한다.
줄어드는 디데이의 숫자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유석의 에세이 《나로 살 결심》을 만난다. 판사였던 작가가 23년 법관의 삶을 마무리하고,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하기까지의 노정을 적은 책이다. 1부에서는 첫 번째 삶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2부에서는 두 번째 삶에서 겪게 되는 과도기적인 시행착오를, 3부에서는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일기처럼 진솔하게 그려진다.
두 번째 삶을 앞둔 시기에 하필 경험자의 이야기가 날아든 건 운명일까. 몇 가지 공통 분모를 발견하며 커다란 울림으로 공감한다. 첫째, 두 번째 삶을 선택했다는 점. 둘째, 그 삶이 글 쓰는 삶이라는 점. 셋째,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서 첫 번째 삶을 마무리한 점. 넷째, 처음에는 평생 첫 번째 삶으로 살고 싶었다는 점. 다섯째, 첫 번째 삶과 연관된 등록도 하지 않은 점. 여섯째, 개인주의자라는 점이다.
내년 2월 28일로 35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할 생각이며,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으나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는 삶을 이어갈 생각이다. 다행히 바로 연금이 나와 생계에 대한 불안감을 덜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으로 떠날 수 있어서. 스스로 떠날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때, 나는 교실에서 제일 신이 나고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과거형이지만. 퇴직 이후 학교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을 작정인 나는 개인주의자다.
3년 전,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저자의 세상을 접한다. 나만 위하며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자도 아니고, 헌신적으로 타인을 위하는 이타주의자도 아니며, 나를 중심으로 살지만 굳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스스로 개인주의자라 여기며 살아가던 중이었다. 반가웠다. 나만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필이 통하는 동갑내기 친구를 발견한 듯 위로 받았던 기억이 있다.
좋은 기억 속에 담긴 작가라서 그가 쓴 《나로 살 결심》 역시 가뿐하게 펼치리라 예상한다. 한데 표지를 넘기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제목 때문이다. 제목은 독자가 처음으로 접하는 작가의 글, 그의 세상을 여는 문고리이다. 첫인상처럼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표지를 넘기기 전이면 매번 제목을 곱씹으며 상상한다. 이 제목을 붙인 이유는 뭘까, 어떤 내용이 담긴 주머니를 매달고 있을까.
독서 모임 도서로 선정될 경우, 비슷한 제목을 훑어본다. 주문하는 책의 제목이 이왕이면 유니크하기를 바란다. 인터넷 서점에서 '나로 살'까지 검색어를 입력하니 연관 제목들이 뜬다. '나로 살아가는 연습,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다만 나로 살 뿐,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나로 살아가는 기쁨'. 나로 사는 일이 많은 이의 관심사임을 반영한다. 동일한 제목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특이점이 '결심'에 있음을 깨닫는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결심'의 중의적 의미를 설명한다. 흔히 우리가 아는, 마음먹는다는 뜻의 '결심(決心)' 이외에도 재판을 마무리한다는 의미의 '결심(結審)'도 있다고 말한다. '재판을 종결하면 더 이상의 주장도, 증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직 판결만 있을 뿐이다. 1년 넘게 법원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이제는 결심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는 변호사 등록도 하지 않으며 첫 번째 삶과의 연결 고리를 말끔하게 정리한다.
결심의, 결심에 의한, 결심을 위한 책이다. '결심'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작가는 현실을 앞에 두고 결심한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임을 인정한다. 첫 번째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망설였던 결심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막상 결심을 실행했지만, 두 번째 삶 역시 녹록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세상은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결심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므로'. 그 안에서 그는 적절한 무게 중심을 찾으며 삶을 당당하게 이어간다.
여러 가지 이유로 좋았다. 미사여구로 포장하지 않아서. 객관적으로 자랑할 조건이 많음에도 잘난 척을 하지 않아서. 다큐멘터리처럼 현실적인 글이라서.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에. 글을 쓰며 살아가는 일상의 이면까지 보여주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둡거나 칙칙해지지 않아서. 풋! 책장 사이사이에 간지처럼 끼워진 유머도. 무엇보다 긍정적으로 삶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글은 사람을 닮아가나. '문유석'이 담긴 글을 보며 글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글에 솔직한 그가 비친다. 어떤 면은 가까이 있는 자신보다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진 타인이 잘 볼 수 있는 걸까. 투명 수채화 같다. 글에 담은 거짓은 포장한 흔적까지 금세 드러난다. 덧칠한 자국도, 물로 희석한 색채도 보인다. 나의 글도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미치자, 키보드를 걸어가는 손가락이 잠시 주춤한다.
에라, 솔직해지자. 내가 쓰는 글이 한 줌의 뻥도 없는 100% 진실의 퓨어 워터는 아니라는 사실을, 가끔은 자뻑하여 다소 과한 액션을 취하는 경우도 있음을 고백한다. 뭐, 그렇다고 근거 없는 사실을 무턱대고 끌어오지 않는 양심은 있다. 서사의 완성도를 위해 글자 크기 11을 15정도로 다소 키울 뿐, 함초롬바탕체를 양재샤넬체로 변신시키는 무모함을 시전하지는 않습니다요. 문학적 허용이라고 당당하게 우기는 중이다.
'당당함'는 예전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가난의 무게에 주눅 들어 바람 빠진 풍선마냥 쪼그라든 채, 주로 구석을 찾아 그림처럼 걸려있는 내성적인 인간이었다. MBTI의 극 I 였다. "네가 교사를 한다고?" 학교에서 말을 잘 하지 않았기에 목소리도 들어보지 못했던 초등학교 동창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친구들에게 가르쳐주는 행위를 좋아하기는 했다, 자리에 앉아 살며시 속삭이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말없이 염화미소를 짓는 내게 친구들은 종종 물었다. 말수가 적으니, 생각이 깊을 거라 여겼을까. 말의 양과 생각의 깊이는 반비례하는 듯 보이니까. 한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말이 없는 나는 사실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을 뿐인데 뭔가 있어 보였나. 주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심 가는 분야는 깊이 파고들었지만, 관심 없는 분야에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아 관심도에 따른 편차가 컸다.
"그 과목을 가르친다고요?" 의외라는 반응은 가르치는 과목에도 있었다. 가정이나 도덕, 국어를 전공할 것 같은 얼굴로 '과학'이라니! 처음 본 누구도 나의 과목을 상상하지 못했다. 몇 번의 사소한 선택을 따라가니 어느새 나는 과학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30여 년 지나니 알겠어. 진로를 잘못 선택한 바람직한 예가 바로 나야." 사회화된 I 의 보유자는 이렇게 떠들고 다녔다.
처음부터 작가의 삶을 선택했어야 옳았을까. 글 쓰는 건 어릴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첫 번째 삶에서의 경험과 고민이 그동안 쓴 글의 씨앗이 되었듯이 어쩌면 '두 번째 삶'에서 경험한 나의 불안, 회의, 어리석음, 나태, 방황 이 모든 것 역시 언젠가 좋은 글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라는 문장이 시선을 붙든다. 지나온 '나'를 진지하게 바라본다. 지금껏 첫 번째 삶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있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과학 교사로서의 삶은 두 가지 면에서 나의 성향에 최적화된 천직이었던 거다.
첫째, 내성적인 나에게 맞춤형 직업은 교사였다. 35년 가까이 오만가지 인간상을 접하며 '인간'이란 존재를 타발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이럴 수도 있음을, 그러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도 저도 아닌 경우도 생각보다 많음을. 교사가 아니었다면 사교성이 없는 내가 그 많은 인간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을까.
둘째, 외골수적인 나에게 과학 과목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국어를 선택했더라면 과학 분야로 고개를 돌리기나 했었을까.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능력이 조금은 있는 것 같으니, 덕분에 풍부한 표현을 장착한 문이과 통합형 인간이 된 게 아닌가. 간혹 과학적인 현상을 빗대어 비유하는 글을 쓸 때, '이럴 수가! 이토록 감탄스러운 표현을!' 자작하다 취한 양 내 글에 내가 취해서 히죽거리며 자신감을 충전하곤 했으니까.
문유석 작가처럼 첫 번째 삶에서의 경험을 글에 조금씩 녹여내게 될 듯하다. 나아가 지금까지의 경험 모두를. 이제는 웃으며 말하는 가난 덕분에, 외로움 덕분에, 슬픔 덕분에 삶의 추위와 더위를 더욱 생생하게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삶은 감사하게도 삶과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씩 넓혀주었던 거다. 글을 쓰며 걸어가고 싶은 두 번째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선택한 삶의 길은 언제나 정답이었다.
명예퇴직신청서를 작성하다 사유를 적는 칸에서 주춤했다. 지긋지긋한 관절염은 나이 때문이니 건강이상이라기에는 민망하고, 입원할 정도로 아픈 가족은 없으니 간병도 아니고, '등단할테다!' 마음먹은 야심 찬 자기 계발도 아니고, 그나마 근접한 사유가 업무 부담 및 부적응인데, 이렇게 적자니 스스로 실패자 같아서, '자기 계발'로 포장하고 '자기 보호'로 읽던 참이다. 이제는 후련하게 작성할 수 있겠다. 글 쓰는 삶을 위한 자기 계발로.
글은 콜드브루다. 차갑거나 미지근한 하루하루의 방울들을 인내하면 마침내 깊은맛을 보여준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를 입었다는 건 무언가를 했다는 증거이다. 상처 입은 경험들은 든든한 빽이 되어 내일의 글을 받쳐준다. 첫 번째 삶을 지나온 나의 빽을 믿고, 두 번째 삶을 시작하려 한다. 콜드브루로 거듭난 글을 마주할 미래의 어느 순간, 나 역시 글을 닮아 깊어져 있으리라 기대하며.
혼자만의 힐링 시간, 아홉 개의 조명 너머로 햇살에 얼굴을 부비는 초록 잎들이 간간이 흔들린다. 왼쪽에서 첫 번째 창에 그림인 양 걸린 풍경이다. 이어폰을 통해 '일하면서 듣기 좋은 카페 음악'이 흘러 들어온다. 단골 카페 2층, 매번 앉는 자리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노트북을 두드린다. 지금 이 순간을 돌려보며 콜드브루로 업그레이드된 글을 쓰고 있는 미래의 나? 새살이 돋은 심장이 간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