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빛의 시간인가, 어둠의 시간인가. 초저녁은 또 어떠한가. 하루 두 번,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을 떠올린다. '개와 늑대의 시간'. 황혼 무렵 나에게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공격하러 다가오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을 일컫는 용어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선인지 악인지, 좋은 이인지 나쁜 이인지, 낮인지 밤인지. 삶은 이런 순간들을 툭 던져 놓고 휘리릭 달아난다. 판단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7편의 단편 소설이 툭 질문을 던져 놓고 달아난다. 소설집 『혼모노』다. 각기 다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들은 한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이다. 그 위에 선 나는 양쪽을 바라보며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한 가지를 찾는다. '진실'이다.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전자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객관적으로 나열한다. 감정이 담기지 않는 AI 느낌이랄까. 후자는 여러 자료와의 관계성에 숨어있는 본질이다. 보다 인간적 요소가 많다.
작가는 세밀한 감정의 동요조차 놓치지 않는다. 반복되는 의성어에도 의미가 담겨 작품 안에서 꿈틀댄다. 미세한 시선의 떨림을 지나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헤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낸다. 크로키를 그리듯 긴박한 전개 속에서 정밀 묘사로 구현한 작품을 마주한다. 성해나 작가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냐고.
표제작 <혼모노>에서 '혼모노'는 진짜를 의미하는 일본어이다. 주인공 박수무당은 삼십 년 동안 자신에게 깃들었던 할멈이 앞집 신애기에게로 옮겨갔음을 깨닫는다. 작가는 바나나 우유와 바나나맛 우유는 뭐가 다른지 독자에게 묻는다. 진짜 무당과 가짜 무당이 함께하는 굿판. 신이 떠난 후 어설프게 진짜를 흉내 내왔던 주인공은 피비린내 나는 칼날 위에서 가벼워진 자유를 만끽한다. 진짜 가짜가 되어 진짜를 압도한다.
작품을 마주하며 생경한 경험을 한다. 한 손은 뜨거운 물에 다른 손은 차가운 물에 담갔다 동시에 미지근한 물로 옮겨온 듯하다. 진짜는 좋은 것, 가짜는 나쁜 것이라는 공식이 파괴된다. 이게 진짜가 맞나, 이걸 가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짜와 가짜의 정의조차 혼란스럽다. 소설은 벌써 끝이 났는데 마침표 끝에 진득한 감정이 묵직한 꼬리처럼 매달린다. 읽은 시간보다 여운이 길다.
작가는 능숙한 외줄타기의 달인인 양 균형 잡힌 시각으로 달려간다. 엉겁결에 덩달아 그 줄에 올라탄 초보 독자는 위태위태한 난감함을 안는다. 꼼지락거리며 줄을 부여잡은 엄지발가락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밖이 훤히 비치는 통창 앞에서 몸을 가다듬는 인간처럼 몸 둘 바를 모른다. 한 번쯤 생각해 보았지만 드러내지 않던 감정이 거울 속 풍경처럼 책 속에 담긴다. 속속들이 끄집어내어 질 때마다 움찔한다.
직장 사람들과의 관계는 수시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긴장의 연속이다. 좋은 마음만 있지 않아도 좋은 마음으로 포장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우호적 감정>은 형식적 관계에서 비형식을 찾는 모순을 다룬다. " · · · · · ·그럴까요?" 말줄임표 안의 드러나지 않는 감정 끝에 정반대의 멘트가 드러난다. 정이 흘러넘치는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은 입에 넣은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대로 머금는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모호함이 AI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0과 1, ON 혹은 OFF. 흰색과 검은색처럼 명료하다. 인간 세계와의 차이점이다. 우리의 삶은 매번 어딘가의 '사이'에 놓이며 흔들린다. 이 소설집에서 일관적인 흐름이 감지되는 이유는 모든 서사가 정반대의 선택지를 품은 채 경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잉태기>는 할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놓인 딸 서진의 이야기이다. 임신한 딸의 해외 원정 출산을 준비하는 엄마와 당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할아버지. 엄마는 할아버지를 '그 사람'이라 표현하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시아버지 역시 며느리를 보는 시선이 만만치 않다. 그들의 공통점은 서진을 향한 '사랑'이건만. 정반대의 척점에서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을 향해 아이를 끌어당긴다. 공항에서 쓰러진 아이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고조되는 갈등 속에서 이야기는 멈춘다. 감추어졌던 독선과 집착이 사랑이라는 외피를 뚫고 드러난다.
타인에 관한 판단은 종종 모순을 동반한다.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의 주인공은 스타 감독의 팬이 된다. 영화를 찍으면서 감독이 행했다는 비도덕적 행위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믿는다.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나락으로 떨구려 할까 하며. 그녀 역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사회에 나온 감독 앞에서 영화를 극찬하는 주인공. 이어진 감독의 사과로 숨어있던 진실이 떠오른다. 외면하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주인공은 뜨거운 허탈감을 느낀다.
젊은 시절의 꿈은 언제까지 유효한가. <메탈> 음악으로 대동단결한 세 명의 친구. 녹슬지도 썩지도 않는 그들의 꿈은 선명하다. 위험하지만 아름다운 원소 '코발트'를 밴드명으로 붙이는 순간, 청춘의 시간은 영원할 것만 같다. 세월이 흘러 친구들은 현실의 길로 떠난다. 주인공은 그들의 아지트를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앨범들을 정리하던 그의 가슴속에 다시 따끔한 전류가 일어난다. 그 진동을 끝내 외면하지 못한 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스무드>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사실을 보면서도 진실을 모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스무드'는 예술가 제프의 작품명이다.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의도도 동기도 비밀도 없는 스테인리스스틸 재질의 검은색 구이다. 그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난생 처음 한국을 방문한 매니저 듀이의 시선에는 가감이 없다. 미국인의 정체성을 지닌 한국인 듀이를 데리고 다니는 친절한 태극기 부대, 열사, 이승만 광장은 좋은 장면으로 묶여 흡수된다. 마주친 이들을 전혀 모르기에 그들 사이에는 아무 갈등도 없다. 그가 보낸 하루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좋은' 하루로 남는다.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은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단편이다. 소설인지 다큐인지 헷갈려서 진짜 이런 건물이 있었나 인터넷을 검색한다. '경동수련원'이라는 소설 속 고문실이 허구라는 사실에 잠시 안도하다, 실제로 있었던 고문 시설 '남영동 대공분실(갈월동 98-8번지)'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에 흠칫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이다. 문외한인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건축가다. 그의 작품을 더 찾아본다. 현대 건축의 거장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업적이 화려하다. 공간사옥, 경동교회, 아르코 예술극장, 남산 자유센터, 세운상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국립부여박물관, 한계령 휴게소. 이런 분이 좁은 수직 창문과 5층으로 바로 연결된 나선형 계단을 지닌 고문 시설을 설계했다니! 인간의 양면성을 구현한 증거물을 접한 기분이다.
관점이 다른 신념은 인간을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가. 소설 속 건축가 구보승에게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다. 그는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루 중 빛이 단 10분만 들어오는 고문실을 설계한 이유다. '구의 집'은 건물의 목적에 최적화된 완벽한 공간이다. 소름 돋는 사실은 그곳이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며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는 건축가의 광기이다. 인간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도 인간을 위한 게 아니냐는 궤변이다.
무지갯빛 해피 엔딩은 없다. 절망적인 새드 엔딩도 없다. 이 순간도 이어지는 삶처럼 성해나의 소설은 마침표가 없는 투비컨티뉴드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소설 끝에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진실은 무엇이냐고.
진실은 상대적이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실은 없다. 주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각기 다른 소유격에 진실은 매달린다. A의 진실, B의 진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같은 사실을 보더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진실이 구현될 수도 있으리라. 진실을 판단하는 과정이 혼란스러운 건 이런 이유로 당연하다. 진실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는 나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리라.
순간순간 균형을 잡아가며 흔들리는 과정의 연속, 삶은 외줄타기와 같다. 나의 진실은 나에게 언제나 옳지만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을 때조차 그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신의 것도 마찬가지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사람이다. 매번 긴장하며 세상과 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다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방심하는 순간 자칫 왜곡될 수도 있는 진실을 경계하며 나아가야 한다. 삶은 수시로 빛과 어둠의 경계에 나를 데려다 놓으니까. 그 순간 내가 할 일은 양쪽을 수시로 바라보며 중심을 잡는 것, 진실의 양면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를 경계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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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0, 밑에서 9째 줄: 존재이도 → 존재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