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나비종
  •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리커버 에디션)
  • 무라세 다케시
  • 12,600원 (10%700)
  • 2022-05-11
  • : 55,023

차는 골목이 있는 길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바퀴를 따라 삼십 여 년 전의 기억이 묻어 나는 길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대학 병원 뒤 허름한 주택가는 너무 많이 달라져 있다. 널찍한 주차장이 나오는가 하면 커다란 건물과 신축 빌라들이 즐비하다. "여기 어디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20대의 발자국이 그렇게 많이 찍힌 거리이니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정도는 몸이 기억할 법도 한데. 깔끔하게 정비된 동네가 신도시인 양 낯설다.

"엄마, 여기께 살았었어?" 그때의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아이가 뒷자리에서 묻는다. "응. 근데 너무 많이 변했네." 가족 식사 후 들른 커피숍이 예전에 살던 동네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수석에서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분주하게 풍경을 스캔한다. "에이, 못 찾겠다." 결혼 전에 살았던 친정집 찾기를 포기한다. 고대 유적지인 양 집터라도 보고 싶었지만 발견하기가 만만치 않다. GG를 선언하자마자 차는 과거의 골목길을 빠져나와 현재의 대로를 달린다.

 

달리는 기차가 들어오는 기차역 풍경이 책 표지를 넘어 앞 뒷면의 날개까지 이어진다. 일러스트의 색감이 좋다. 자그마한 체구에 봄날 여리여리한 꽃잎 같은 겉모습을 지닌 책이다. 불빛을 받으니 낮의 공간을 채우는 별이라도 내려온 양 무늬가 반짝인다. 첫 느낌은 화사한 봄이지만 선뜻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제목의 문구 때문이다. 죽음의 상징일까. 희망 없는 삶만큼 묵직한 단어라 샤랄라한 마음으로 펼쳐볼 수 없었다.

어둠의 아우라가 예상되는 책을 굳이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웃 나라이기는 해도 외국 소설이니 우리 정서와 잘 맞을까 의구심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책을 눈앞으로 데려오고 이틀 만에 완독했으며 바로 노트북을 두드리는 걸 보면 이건 차라리 운명일까. 몇 주에 걸쳐 책을 읽고 다시 그만큼을 고민해야 느낌이 정리되는 편이건만 기다렸다는 듯이 손끝으로 글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보통의 기다림은 그 자체로 희망을 내포한다.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하므로. 오면 좋고, 오지 않더라도 욕심을 내려놓으면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안타까운 상황은 대상의 부재로부터 온다. '있다'에서 '없다'로 전환되는 순간은 얄궂게도 예고라는 게 없다. 한순간에 훅 다가온다. 사랑하는 이를 마음에 품은 이는 이런 이유로 종종 긴장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무라세 다케시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뒤늦은 회한으로 가슴 아파할 상황은 당신이나 나에게도 예외로 빗겨가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함께하는 지금은 더없이 소중한 순간이다.

 

이 소설은 기차 탈선 사고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령 열차에 올라타서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약혼자를 잃은 여자, 아버지를 잃은 아들,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잃은 소년, 열차를 운전한 기관사를 잃은 아내 등 4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커다란 틀은 옴니버스식인데 각각의 이야기에는 나머지 에피소드 속 등장인물이 조금씩 얼굴을 비추며 연결된다.

판타지 설정이 이질적이지 않아 현실처럼 전개가 자연스럽다. 옮긴이의 주석이 해당 페이지에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읽어왔던 상당수의 책이 주석을 맨 뒤에 부록처럼 수록해 놓아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왔다 갔다 책을 들춰보는 일이 반복되면 맥이 끊겨서이다. 소설은 작가가 펼쳐 놓은 흐름을 따라가는 장르이니 동시통역사를 옆에 둔 것처럼 바로 확인하여 몰입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했다.

 

감정이입이 되어 몰입한 에피소드는 2화와 4화이다. 매번 책을 거울삼아 나의 삶을 비춰보는데 두 이야기가 현재 상황과 가장 근접해서인 듯하다. 부모와 자식, 부부 사이의 관계, 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야 그와의 관계를 돌아보며 아파한다. 유령 기차는 그들의 회한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는 판타지적인 장치이다.

유령 기차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죽은 이가 승차했던 역에서 타야 하며, 피해자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열차가 사고 지점을 통과하기 전에 미리 내리지 않으면 자신도 죽게 된다. 마지막으로, 죽은 이를 만난다고 해서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죽은 이와 대화를 해볼 한 번의 기회만을 얻을 뿐이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더라도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제대로 된 이별을 위해 기차에 올라탄다.

 

아들의 관점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묘사한 2화에서는 직업의 의미를 근본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던 아들은 직장에서의 불합리한 처우에 밀려나 몇몇 임시직을 전전하다 칩거 생활을 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후 당신의 흔적을 찾던 그는 변변치 않아 보였던 아버지의 일이 베푸는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평소 당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따라가며 비로소 커다란 사랑의 테두리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유령 기차에서 만난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넨 말이 인상적이다.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느끼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것, 삶에서 해답을 가르쳐주는 건 컴퓨터나 로봇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이라는 말이다. 나의 부모님과 아이들을 떠올린다. 이제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자식을 향한 마음을 헤아리는 나를 발견한다. 몇 년 뒤의 퇴직 이후에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면 좋을까 상상해 본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더욱 커질 터이다. 두려움과 용기는 같은 말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정박한 배는 부서질 염려가 없다 하던가. 바다에 나가 파도와 맞서며 항해하지 않는 배를 '배'라 부를 수 있을까. 바다를 동경하며 항구에만 머무는 안전한 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이제는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치열했던 시기를 지나오면서 지쳤던 마음을 다독이면서 마음이 기뻐하는 일을 하며 나머지 시간을 걸어가고 싶다. 그 시작에는 분명 글이 함께 하리라. 나의 외로움과 슬픔과 아픔을 품고 함께 내 삶을 걸어온 나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글은 분명 나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과도 연결되리라 믿는다. 그때까지 이렇게 책을 읽고 느낌을 정리하며 조금씩 닻을 올리고 싶다. 바다로 항해할 내일을 꿈꾸며.

 

내일도 오늘처럼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리라 생각했던 아내에게 오늘 아침은 남편의 얼굴을 보는 마지막이 된다. 사고 기차를 운전했던 기관사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다룬 4화를 따라가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린다. 운전하기 좋은 대로를 두고 굳이 골목길로 핸들을 돌렸던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쪽으로 한 번 가보자 얘기한 적 없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당신도 나와 함께 한 시간을 다시 꺼내어 보고 싶었을까. 하루의 아쉬운 이별이 찰랑거리던 순간들을, 함께 걷던 그 거리를, 삼십여 년을 훌쩍 타임 슬립하여 재연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지. 말로 표현하기보다 은근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소한 순간들이 조각조각 되살아나더니 퍼즐 판을 향해 자리를 잡는다.

 

당신이 운전을 가르쳐주던 주차장 근처의 커피숍에서 나와의 추억을 아이들에게 얘기해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근처 주차장이 아래위 이중이라, 언덕에 올랐다 출발하는 연습을 했지. 코스도 분필로 그려가면서 연습하고." 운동 신경이 연합 신경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여자친구를 만나 개고생을 했던 남자. 결국 그녀의 손에 운전면허증을 쥐어준,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이다.

"여기가 적당했던 거야?" "엄마 옛날 집 근처라 데려다주기 좋아서." "한 번은 순찰 도는 경찰들에게 걸린 적도 있었지. 엄마가 무면허인 상태였으니까." "오호! 그래서?" 무용담을 듣는 듯 아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경찰은 내 기억에 없는 인간이다. 그런 적이 있던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당신은 어찌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말하고 있을까. 차마 나는 기억 나지 않는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미소 지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을 잊고 살았던 걸까. 얼마나 많은 일들을 우리는 함께 지나왔던가. 사소한 오해와 원망들이 먼지처럼 쌓여 보석 같은 장면들을 가리고 있었나. 더께를 한 꺼풀씩 벗기는 마음으로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다. 몇 년 전만 해도 당신이 나의 글에 들어오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늘 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머물고 있던 당신을 요즘에야 제대로 본다. 흐릿했던 마음의 거울이 점점 닦여가는 중일까.

밀대로 청소하는 당신이 안방에 오면 침대에 냉큼 올라가서 말한다. "구석구석 닦아주세요, 구석구석.(의역: 당신이 좋아요.)" 정말 문까지 뒤집고 구석구석 밀고 가는 당신에게 농담처럼 말을 건네는 순간이 나는 재밌다. 외출하려는 당신에게, "포도당과 과당과 신선한 비타민을 섭취하고 싶어요.(의역: 포도 사다 줄래요?)" 돌아오는 당신의 손에 꽃다발인 듯 포도송이가 들려있다. 흑백만 보이던 삶에 환한 빛이 켜진 듯 색깔로 물든 삶이 반짝인다, 이런 사람인 당신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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