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나비종
  • 단 한 사람
  • 최진영
  • 13,500원 (10%750)
  • 2023-09-30
  • : 31,101

모든 생명은 세포분열을 한다. 몸집을 크게 하거나 생식하거나 저마다 목적을 품고 새로운 세포를 만든다. 세포분열이 거듭될수록 유전정보를 담은 염색체의 말단은 짧아진다. ‘텔로미어’라 부르는 부위이다. 텔로미어가 소멸하는 순간 세포의 생명은 끝난다. 죽음으로 향하는 노화가 시작된다.

식품의 유통기한처럼 나의 세포 역시 생명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으리라. 환경에 따라 다소 연장되거나 단축된다 해도 마지막 순간을 향해 나의 몸은 달려갈 터이다. 잡을 수 없는 시간처럼 말이다.

현재로서는 텔로미어의 단축 속도를 늦추는 방법뿐이다.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식생활, 운동, 수면 등 건강한 몸을 위한 일반적인 권장 패턴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집 주변에 녹지가 많으면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속도가 느려져 생물학적 연령이 2년 이상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식물은 역시 버릴 게 없는 완벽한 식품처럼 인간에게 유용한 존재인가. 녹지까지는 아니지만 출퇴근길에 나무 곁을 지나간다. 우뚝 선 나무들을 바라보며 가끔 나무가 말을 거는 장면을 상상한다.

-어젯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어. 내 잎이 이만큼이나 바닥에 떨어졌단다.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인 양 나무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다.

-아깝지 않니?

가을을 품은 나무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답한다.

-때가 되어 떠난 건데, 뭘. 할 일을 다했으니 무슨 아쉬움이 있을까.

나무도 나처럼 숨을 쉬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삭막한 도시를 유영하는 침묵에 둘러싸여 쫓기듯 달려가느라 초록빛 숨결이 물결치는 장면을 휘리릭 넘겨버려 왔나. 눈앞에 놓인 책 표지의 초록을 보니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호흡이 느려진다.

 

겉표지의 무성한 초록 아래로 나무를 응시하는 단 한 사람과 그의 그림자가 시선을 끈다. 옆으로 누운 느낌표 같다. 『단 한 사람』. 마음을 집중하게 만드는 문구이다. 어떤 의미를 지닌 사람일까. 내용이나 맥락을 떠나 ‘단 한 사람’은 어떤 이를 연상케 하는가.

단 한 사람을 주재료로 상상의 요리를 펼친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 남는다면 어떤 이가 남을까. 당신 곁에 단 한 사람만 남을 수 있다면 지금 누가 떠오르는가. 나를 가장 아껴주는 단 한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가장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은 누구인가.

러브스토리를 짐작한 건 나만의 상상이었던가. 책을 읽을수록 나의 가정은 허물어진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핀 조명이 내리쬐는 영역에 있지 않을 뿐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사랑은 이보다 광범위하다. 가족, 소외된 사람들, 삶과 죽음에 대한 사랑을 폭넓게 다룬다.

 

소설『단 한 사람』은 나무를 매개로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사람만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몽환적인 설화 느낌도 나고 판타지 소설의 외피를 입은 듯하지만, 지극히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한다. 삶과 죽음의 본질을 통찰하는 시간을 건넨다.

외할머니로부터 어머니, 주인공 목화에 이르기까지 모계로 이어지는 똑같은 과업은 수천 년을 생존하는 나무의 능력과 연결되면서 시작된다. 세 사람이 미션을 바라보는 관점은 제각기 다르다. 외할머니에게는 기적, 어머니에게는 지옥이다. 주인공 목화는 이 일을 ‘중개’라고 표현한다.

죽음을 맞는 사람들에게서 그녀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이 말을 몇 번이나 했던가. 얼핏 기억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건 언제더라. 역시 희미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쑥스럽고 어색하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말을 삼켰던가.

 

죽음 이후에 남을 나의 흔적은 무얼까. 물건을 정리하면서 시곗바늘을 상상한다. 채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시각을 가늠한다. 내가 사용하지 않은 물건의 유통기한은 언제일까. 내 몸을 이루는 세포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허탈한 건 쓰임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죽음으로 툭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삶과 죽음은 가장 먼 듯하면서 가깝다. 삶과 죽음을 1부터 100까지의 숫자로 표현하라면 삶은 1로, 죽음은 100이라고 여긴다. 이들 사이의 거리가 나에게만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자만한다. 흔한 착각이다.

삶의 범위는 1부터 99까지 넓은 스펙트럼으로 퍼져있다. 언제 도약적으로 뛰어 99가 될지도 모른다. 무작위로 던져지는 주사위처럼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99도의 물이 100도의 수증기로 변하는 순간이 불현듯 온다. 작가의 표현처럼 느닷없는 죽음, 말도 안 되는 일, 눈 깜빡할 사이에 생사가 갈린다.

 

박스 접는 AI에 의해 허망하게 죽은 뉴스 속의 노동자가 떠오른다. 0과 1로만 작동되는 로봇에게 눈앞의 대상은 흑백 화면 속 음영으로만 존재한다. 로봇은 생명과 생명이 아닌 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안대를 두른 채 거침없이 팔을 휘두르는 거인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순간적으로 섬찟하다.

뉴스는 하루에도 몇 건씩 말도 안 되는 죽음을 쏟아낸다. 소설 속 문장이라면 차라리 좋을 죽음을 토해낸다. 이토록 허탈하고, 찰나적인 끝맺음이라니. 더욱 안타까운 건 세상을 향해 드러나는 죽음보다 드러나지 않는 죽음이 많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그늘진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사그라드는 죽음을 조명한다. 노후 설비를 교체하다가, 자재를 옮기다가, 조형물을 설치하다가, 이물질을 제거하다가, 청소하다가 죽는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을 일깨운다.

 

사고는 흔하고 무작위로 일어나는 죽음은 보통 명사인듯하다. 죽음은 언제나 막연한 끝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겨왔다. 블러 처리된 그림처럼, 그저 삶에서 멀리 떨어진 배경처럼, 아득한 지평선처럼 외면하고 살아왔던 듯하다.

대부분의 죽음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 터이다. 그 순간이 온다면 간절하게 타임머신을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에게 만큼은 오지 않기를 바란다. 삶의 분명한 종착점은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 특별한 고유 명사로 변화하니까.

이 책에서는 죽음이라는 낱말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작가는 죽음의 속성을 샅샅이 묘사한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경고한다. 이와 더불어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도 언급한다. 예컨대 마지막까지 바라보고 싶은 사람을 바라보다 맞는 죽음 같은 경우이다.

 

되살리지 않아도 좋을 죽음이라…. 나에게도 다가올 죽음이 이런 모습이면 좋겠다. 후회 없는 지금으로 채운 삶, 영원한 오늘을 누려온 삶을 살아왔다면 미소 지으며 그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으리라.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온 삶이라면, 오늘 지금의 삶을 걸어간다면 가능할 수 있겠다.

사실 인간의 언어로 죽음을 적확하게 묘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죽음은 언제나 말보다 위에 있으니까. 갈팡질팡하는 말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아이러니한 건 죽음에 접근할수록 삶의 의미가 선명해진다는 거다. 빛을 건너 어둠을 향해 다가가듯.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갈등과 고통의 연속이다. 타인의 죽음에 개입하게 된 주인공 목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깨닫는다. 중요한 건 따로 있음을, 운명에는 자신만의 몫이 있어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음을. 그녀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끄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의 삶이 고유한 만큼 타인의 삶 역시 그렇다. 각기 특별한 삶은 관계로 얽힌다. 소설 속 가족, 연인, 사회적 관계에서 오가는 감정의 농도를 생각한다. 관계의 키는 옆으로 자라 상대의 심장을 향한다. 두 개의 심장에서 나오는 파동이 공명한다. 음악 같은 순간들이 켜켜이 쌓이면 감정은 짙어진다.

주인공 목화는 자신이 목숨을 구한 이들의 삶을 거울인 듯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바라본다. 자기가 자기를 구해야 함을, 누군가 대신 삶을 살아주는 게 아님을, 모두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니 상대의 삶이 어떤지 알 수 없으므로 쉽게 판단하지 말 것을 깨닫는다.

죽음에서 출발한 그녀의 결론은 삶이다. 저자의 결론이다. 삶은 죽음과 탄생 모두를 담는 그릇이라고. 둘이었다 하나가 된 나무처럼 나눌 수 없는 거라고. 죽음으로 둘러싸인 소설의 끄트머리가 삶을 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원하는 삶과 원하는 죽음은 동일한 의미를 품으니까.

 

구운 생선을 발라 먹는 장면을 떠올린다. 부드러운 속살과 따끔거리는 가시가 공존하는 음식 말이다. 맛있는 생선 살을 남김없이 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잘한 통증을 감내해야 한다. 세상에는 정반대의 요소가 공존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삶이 고통이자 환희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세포가 모여 보이는 생명체를 이룬다. 구름방울 백만 개는 빗방울 하나를 이루고, 빗방울들이 모이면 폭우가 쏟아진다. 인류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단 한 사람은 분명히 존재 한다. 작가는 그 한 명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당신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며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텔로미어는 염색체가 풀리는 현상을 막아준다. 유전정보를 지켜주는 울타리이면서 세포의 삶을 끝까지 바라보는 물질이다. 마지막이 있기에 과정은 의미롭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에 삶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뒤표지, ‘작가의 말’에서, 1째줄: 기억하기 위해 → 사랑~

뒤표지, ‘작가의 말’에서, 5째줄: 언젠가 → 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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