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와 '증'의 소설
greenish_blue 2010/07/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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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교
-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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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 - 2010-07-06
: 11,814
책을 손에 들고, 앞표지를 열고, 두 시간 20여 분간 꼼짝없이 앉아서 후루룩 읽어내려갔다. 책에 대한 사전 정보라고는 '등장하는 여자아이의 이름이 은교'라는 것밖에 없었기에, 다짜고짜 처음에 등장하는 이적요의 고백에 정신이 화닥닥 깼다.
두 시간 20여 분 후에도 계속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뭘 말하려고 했던 작품일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뭘 말하려고 하는지 몰랐던 게 아니라, 감정 혹은 마음으로는 느껴지는데 머리 혹은 내가 아는 단어들로는 단박에 표현할 수 없음에 당황했던 것일 게다. 남녀의 삼각관계라 하기는 불충분하고, 늙어버린 유명 시인의 롤리타 컴플렉스가 주된 내용이라 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은교'를 읽는 내내 느꼈던 것이 무엇인지를, 근접하게나마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찾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어나면 그 느낌마저도 흔들리거나 사라질지 모른다 싶어서.
다행이었다. '애증'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던 것이.
이적요는 은교에게 '애'를 느낀다. 동시에 열일곱 소녀에게 '애'를 느끼는, 이제는 늙어버린 자신에게 '증'을 느끼고, 문하생으로서는 영 가망이 안 보이는데 은교에게는 자신보다 더 가망 있는(?) 남자인 것 같은 서지우에게도 '증'을 느낀다. 서지우는 존경했던(이것을 사제관계에서의 '애'라 할 수 있겠다) 스승의 욕망을 발견하며 '증'을 느끼고, 자신을 향한 스승의 증오감이 실체를 나타냈을 때, 생을 끝맺을 선택을 한다. 만일 서지우의 죽음에 그 자신의 선택이 포함되어 있음을 이적요가 알았다면, 그것은 아마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한 형태로 나타나는 '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열일곱 은교는 등장인물들 중 최강자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드러내지 않지만 욕망을 죄처럼 숨기지도 않으며, 어쩐지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는 것 같은 존재다. 절대적 권력(?)을 가진 여신은 상당히 자극적이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과 말투로 발 아래의 남자들을 대하며 지켜본다.
'은교'를 연애소설이라 말하기 주저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달콤한 밀애나 인물 상호간의 아름다운 감정 교환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책을 덮은 뒤 생각해보면 그건 어쩐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애틋한 감정은 애초부터 거세된 상태에서 오갔던 행동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녀의 연애 감정을 다룬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소녀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벌이는 애증의 감정을 다룬 소설'이라고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정리가 된 후에야, 나는 세 시간 가까이 마시지 못했던 물 한 컵을 들이키기 위해 일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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