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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활
어쩔수가없다, 2025
곰곰생각하는발  2025/10/08 13:49


후안무치도 유만수


현대에 와서 영웅은 슈퍼맨이나 베트맨처럼 힘센 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은 헤라클레스가 아니다. 헤라클레스는 그냥 힘이 센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 헤라클레스는 여자에 미쳐서, 나중에는 광기에 사로잡혀 자식들을 죽인 난봉꾼이다. 왕년은 휘황찬란했으나 말년은 정신 착란 했던 클래스.....


오히려 그리스 비극 서사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는 오이디푸스다. 자기 서사의 실패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스스로 눈알을 도려낸 그야말로 비극적 영웅이다. 오이디푸스의 잘못된 행위는 온전히 그의 잘못이 아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운명 앞에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순응했을 뿐이다. 그는 신이 두는 체스판 위의 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선택과 행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가 없다 _ 라는 변명 대신 스스로 눈을 도려냄으로써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다는 프레임은 반드시 어쩔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영화 속에서 만수는 최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최악( 세 번의 살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병헌의 동네 목욕탕 동굴 보이스로 발화된 독백 속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최선과 최악 사이에 놓여진 무수한 차선(책)이다. 인간의 욕망은 누구나 다 최선책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현실은 무수한 차선책 중에서 하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릴 적 꿈은 대통령이었지만 성인이 되면 9급 공무원 시험 합격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수는 차선을 선택(어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인간이다.


오이디푸스의 한국어 이름이 명백한 오대수( : 올드보이)와 유만분수1에서 이름을 따온 것처럼 보이는 유만수( : 어쩔수가없다)는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다. 오이디푸스의 오(이)대(푸)수는 신탁에 의해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 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신이 정한 길을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은 그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신의 잔인한 놀이 탓이다. 반면에 유만(분)수는 정리 해고라는 신탁( : 정리해고는 신자유주의의 신탁이다)을 거스르는 캐릭터다. 그에게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강력한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 자유의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폭주한다.


그의 행위는 전형적인 후안무치도 유(만)분수요, 적반하장도 유(만)분수다. 그는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선택함으로써 최선을 다시 획득한다. 형식적으로는 악인의 최종 승리로 끝이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는 것은 죄의 전이다. 가족은 남편 혹은 아버지의 죄를 목격한다. 정원에 심은 사과나무가 사체의 양분을 토대로 무럭무럭 자라날 때마다 가족은 은폐된 죄의 공모자라는 인식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 경찰 신문 조사에서 흔히 하는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라고 한다. 후안무치도 유만수다.



                                  

1)  有萬分數 : 유(만)분수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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