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나를 붙들어 준 그림책을 기억한다. 집 앞 도서관에서 열린 동화구연 수업에서였다. 누군가 나에게 읽어주는 그림책을 들은 경험이었다. 앞에 선 선생님이 동화책을 넘기며 읽어주시는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가슴이 몽글몽글 벅찼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의 목소리도 좋았지만 눈을 맞추며 가만가만 책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그 순간, 위로와 감동을 느꼈다. 지금도 그때의 마음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 뒤로 나의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마음이 달라졌던 것도. 그렇게 동화구연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도서관에서 동화구연 봉사를 하게 되었고, 도민 강사로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고, 보육교사가 되었다. 내향적인 나의 미래에 있어 전혀 예측할 수 없던 길이었다. 따뜻한 어른과 그림책으로 연결되어 내가 달라지게 된 그날, 내 안에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그날을 지금도 떠올리며 아이들을 만나고 나를 돌아본다.
아무리 우울한 순간이라 해도 절대 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입니다. 《어두운 겨울밤에》는 작가 플로라 맥도넬 자신이 우울증을 겪었던 경험을 담은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합니다. 우울증이라는 깊고 깊은 겨울밤을 지나 탄생한 이 그림책 자체가 바로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요? -p.106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은 나를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림책을 통해 받은 위로와 용기를 아이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면서,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나를 더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충만하고 행복하지 않은 채로 아이들에게 그러한 마음을 전달할 수 없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됐다.
내 아이를 위한 독서였는데 자꾸만 내가 떠올랐다. 마흔이 넘어 이제야 나를 만난다. 그 과정에서 겪는 고민들을 아이들도 똑같이 겪고 있다. 나도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고민들은 나이를 먹어도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은 나와 달리 성인이 되기 전에 답을 찾게 될까. 고민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안쓰럽고 뭉클하고 대견하다.
사춘기 자녀를 이해하기 위해 책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육아서가 부담스럽고 어려운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다른 아이들의 고민을 통해 내 아이의 모습을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과 더불어 나의 유년을 떠올리게 되고, 책 속 질문에 답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이를 이해하고 돌보는 부모가 되기 위해선 내가 먼저 돌봄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가 채워주는 돌봄은 나이가 들수록 어렵고, 어릴 때 충분히 받고 자라는 일도 드물다. 그러니 내가 나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충분하게, 자녀에게 해주고 싶은 돌봄을 나에게 먼저 해내야 한다.
인생에서 두려운 것이 어디 시험뿐일까요. 사춘기가 지나고 나면 또 새로운 두려움이 여러분 앞에 나타날 거예요. 사자로부터 벗어난 파랑 아이가 이번에는 곰과 마주쳤듯이 말이지요. 어쩌면 인생은 계속해서 새로운 두려움을 만나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춘기에 진정으로 중요한 과제는 단지 높은 시험 점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를 익히는 것입니다. -p.80
아이들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학업만큼 삶의 고민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꼭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은 힘이 든다.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학업으로, 시간이 없어서 불편한 마음을 피하고 미룬다. 아이들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알고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불편한 상황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힘과 마음을 발휘할 수 있길 바란다. 마음이 아프기 전에 이러한 힘과 마음을 다져가는 과정이, 연습이,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어른과 함께. 비난과 질책이 아닌 긍정의 말과 응원으로 좋은 질문을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 아이들 곁에 좋은 어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 또한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그림책을 읽는다.
사람을 바꾸는 말은 어렵고 멋진 말이 아니다. 익숙하지만 사려 깊고 따뜻한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움직인다. 그림책에 쓰인 언어들이 그렇다. 짧지만 묵직하게 마음을 누르고 뻐근한 그 자리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거기엔 외면했던 감정들, 우리가 품어야 할 진짜 모습이 있다. 그림책은 읽고 즐기는 일을 넘어 각자의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내보이게 한다. 아이와 부모,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심리적 거리를 좁혀 서로의 마음을 마주 보게 한다.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그 마음이 어려워 망설이게 된다면 이 책이, 돋보기쌤의 이야기가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오래 담고 싶은 문장 발견했다. '혼자만의 작은 모험' 그 표현을 보는 순간 그래 이거야, 하며 마음이 설렜다. 내가 지향하는 삶. 혼자만의 작은 모험 안에서 스스로의 선택과 실행으로 채워진 이야기를 갖는 것. 그 과정을 음미하고 숙려하는 것. 파랑 아이의 얼굴에 두려움 대신 차오르던 기대감(p.78)처럼 말이다. 오래전 나를 위해 샀던 『그림책으로 쓰담쓰담』 그리고 『그림책, 사춘기 마음을 부탁해』까지. 꼭 필요한 어른의 목소리로 질문과 응원이 담겨 있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그러나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목소리와 이야기 나누게 된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어른 쪽으로 성장하리라 믿는다.
혼자만의 작은 모험을 마치고 아가타는 다시 캠핑장으로 향합니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아가타는 아이들과 어울려 모닥불 앞에 앉습니다.
그 자리가 자신에게 딱 맞게 느껴집니다.
산의 환한 웃음을 마음에 품은 채 아가타는 잠자리에 듭니다.
그렇게 산속 캠핑장의 밤은 깊어 갑니다.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