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아이,
상실과 극복,
안주와 도전,
절망과 희망.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 말하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그 사이에 있는 상태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시기,
사라진 것도 아닌데 끝났다고 여겨지는 슬픔,
떠날 용기는 없지만 돌아가기도 싫은 마음,
완전히 어둡지도 환하지도 않은 회색의 새벽.
흑백, 음양의 세상에서
이런 ‘사이’에 있는 것들은 이름을 얻지 못한다.
이름이 없으니 설명도 어렵고,
설명이 안 되니 이해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나는 이런 상태를
삶의 그레이존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진, 현씨, 아빠, 동주, 해미언니...
청소년 소설 ‘2.5층 너머로’에는
바로 그 그레이존에 멈춘 사람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아진이는
엄마의 죽음과 친구 세나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사춘기라는 폭풍을 한꺼번에 맞는다.
2층도 3층도 아닌 계단참에 마음을 내려놓고
누구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간신히 하루를 통과한다.
겉으로 보기엔
조금 무뚝뚝하고 예민한 아이.
친구들 눈에는 그런 모습만 보이고,
어른들 눈에는 사춘기로만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아진이는
상실과 죄책감, 성장 사이 어딘가에서
정처 없이 떠다니는 중이다.
이 소설이 다정한 이유는
그 애매한 자리에 기꺼이 이름을 붙여 준다는 데 있다.
그 이름은 '2.5층'이다.
2층도 3층도 아닌,
위도 아래도 아닌 그 계단참은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사춘기,
상실과 극복 사이의 애도,
안주와 도전 사이의 망설임을
그대로 품고 있는 공간이다.
작가는 아진을 통해
2.5층에 머무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괜찮아, 아직 거기 있어도 돼.
움직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조금 오래 멈춰 서 있다고 해서
실패한 건 아니야.'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고,
각자가 혼자 건너야 하는 그 시간을
있는 그대로 통과해 보자고.
그리고 이 책은
2.5층 아이들의 곁에 서 있는
우리 같은 어른들에게도
조용한 당부를 남긴다.
쉽게 조언하거나
‘이제 됐지?’라며 서둘러 묻지 말 것,
그 옆에 함께 머물며
마음속 진실을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려 줄 것,
겨우 입 밖으로 나온 말을
고치려 들지 말고
먼저 들어 줄 것.
어쩌면 우리 모두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자기만의 2.5층을 지나왔을지 모른다.
혹은 아직도 그 층에 서서
다음 계단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2.5층 너머’를 덮고 나니
내 곁의 2.5층에 있는 아이들,
그리고 예전의 나 자신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삶의 사랑니를 앓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견디고 있을
모든 아진이들에게
이 말을 건네고 싶다.
네가 있는 곳은 희뿌연 공중이 아니라
엄연한 2.5층이고,
네가 준비되면
언제든 너를 마중하겠다고.
지금 그 자리에서도
너는 이미 충분히 잘 걷고 있다고.
저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개와 산책을 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혼자여서 마음을 놓고 있다가
어쩌다 시선이 겹치면
모른 척해 주면 된다.
우리가 각자 보낸 시간을 지나
아침이 오고 있었다.
저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개와 산책을 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혼자여서 마음을 놓고 있다가
어쩌다 시선이 겹치면
모른 척해 주면 된다.
우리가 각자 보낸 시간을 지나
아침이 오고 있었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