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크레스의 『허공에서 춤추다』는 중편 분량의 소설이 네 편이나 실려 있는 (「스페인의 거지들」, 「경계들」, 「올리트 감옥의 꽃」, 「허공에서 춤추다」) 작품집이다. 물론 단편 분량이나 초단편 분량의 소설도 실려 있긴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쓰다 보면 자연스레 중편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고 세간에서도 ‘중편에 능한 소설가’로 평가받기도 했으니, 이 작품집의 가치는 이 중편 네 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가 중편을 쓰는 이유로 다음 이유를 들었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에 충분할 만큼 길면서 하나의 플롯만 있어도 충분할 만큼 짧다. 또한 장편소설보다 밀도가 높으면서도 작업을 할 만한 중분한 공간은 있다.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중편은 SF의 복잡한 설정을 담을 충분한 공간이 있으면서도, 스피디한 진행과 단순한 플롯이 있다. 나만의 주장이지만, 이러한 중편의 특성이야말로 앞으로 미래의 콘텐츠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 아닐까 한다. 쇼츠, 릴스 등 짧은 순간의 도파민 콘텐츠에 중독되어 가는 콘텐츠 소비자들은 이미 장편의 지루하고 현학적인 스토리를 즐기기 어려워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단편의 단순하고 얇은 세계관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중편에는 이것들이 있다. 도파민을 우러나게 할 정도로 충분히 깊이 있는 세계관, 그러면서도 스피디하게 뚝딱 읽을 수 있는 제대로 된 스토리.
조만간 중편 SF의 봄이 오지 않을까?
낸시 크레스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유전공학을 소재로 하면서 그 과학의 윤리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그에 덧붙여 가족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스페인의 거지들」은 유전공학으로 잠을 자지 않게 태어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주인공과, 평범하게 태어난 동생 간의 관계를 그린다. 「올리트 감옥의 꽃」은 기억 왜곡 실험의 윤리성과 함께 동생을 스스로 살해한 언니의 기억에 관해 다룬다.「허공에서 춤추다」는 유전공학으로 슈퍼휴먼이 된 발레리나의 윤리적 문제, 그리고 엄마와 딸의 갈등과 용서를 그린다.
「스페인의 거지들」은 가장 많이 알려진 낸시 크레스의 최고작이다. 잠을 자지 않게 유전자 조작을 행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보유한 사회가 이미 태어난 그들을 왜 차별적으로 대하는지, 그리고 그들은 그 차별을 어떻게 이겨 내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말은 차별을 이겨 내기 위한 연대와, 서로의 처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 발짝씩의 발걸음으로 끝난다. 괜찮은 작품이었으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는 사소한 불만이 있었다. 첫 번째로, 과연 잠을 자지 않도록 설계된 인간이 모두 뛰어난 인간이 될 것인가? 내 생각엔 아니다. 게으른 사람은 (그 기질을 유전적으로 고쳐놓지 않으면) 밤새 게임이나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수면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밤에 어떤 생각을 할까? 내 기억에, 시험 전날의 밤샘 공부는 새벽의 슬픔, 우울, 멜랑콜리함이 몰려오는 감정의 시간이었다. 소설의 인물들은 거의 밤 동안 내내 공부만 하는 괴물같은 공부 머신으로만 그려진다. 밤의 어두움이나, 홀로 있음, 공포 등의 감정에 대해 좀 더 그려줬으면 훨씬 더 공감이 갔으리라 생각한다.
「올리트 감옥의 꽃」은 과감하게도 인간과 인식이 다른 외계인과, 여러 외계인 간의 소통이 존재하는 우주적 스페이스 오페라이다. 가족 간의 관계 같은 작은 이야기들에 능한 작가 특성상 무리가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꽤 잘 만든 설정을 가진 좋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구성하는지,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명확한 현실의 지도를 머리에 담고 다니는지에 관한 이야기”, 즉 철학적 인식론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말은 열린 결말인데, 내 기준으로서는 썩 맘에 들진 않았다. 이 작품을 장편 시리즈로 개작한 『확률 우주』라는 작품이 있다고 하며, 존 W. 캠벨 상을 받는 등 평가는 괜찮아 보이니 기회가 되면 (번역판이 출간된다면) 결말이 더 좋아졌는지 읽어볼 만 하겠다.
내 기준 최고작은 「허공에서 춤추다」이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혔는데, 내 평도 그렇다. 이 소설은 앞서 말한 슈퍼휴먼 발레리나, 유전공학의 윤리성, 엄마와 딸 관계 외에도 특별히 유전공학으로 설계된 ‘말하는 멍멍이’가 나온다. 정말로 귀엽고 흥미롭다. 발레를 소재로 한 SF라는 참신함도 새롭다. 인물들 모두가 모이는 절정 씬은 마치 봉준호 작품 『기생충』의 파티 씬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결말도 뛰어난데, (사소한 스포일러를 하자면) 자식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에 대해 부모가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다는, 아주 사적이면서도 기분 좋은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