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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 록산 게이
  • 19,800원 (10%1,100)
  • 2024-11-15
  • : 2,136

SNS, 블로그, 뉴스 댓글 등, 모두가 한 마디씩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듯한 오늘날에 록산 게이의 '의견들'을 읽는 의미는 무엇일까? 만약 이 글이 자신의 '취향'을 과시하듯 보여주는 글이었다면 이렇게 리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트럼프가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미투(#Metoo) 운동이 일어났으며, 흑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 혹은 부주의한 살해 사건이 끊이지 않는 배경에서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가 울려퍼진 10년 동안의 미국에 대해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힌 기록이기에 그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범죄들이 공권력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때이니 말이다. 

록산 게이의 신간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칼럼니스트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인 록산 게이가 미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이슈에 글과 말로 참견해온 10년 동안의 기록 중 오래도록 읽힐 최고의 칼럼 66편을 모은 칼럼집이다. 사실, 지면을 부여받는 것도 일종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록산 게이는 그 무게를 기꺼이 지고, 지면, 팟캐스트, 유튜브, 시사 프로그램 등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쓰고 말한다. 나는 그 점이 좋다. 의외로 공인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일상을 뒤흔드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면을 가지고도 꼭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록산 게이는 특히 미국의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는데, 록산 게이는 자신이 속한 자리, 즉 아이티계 흑인이라는 뿌리, 교수라는 지위, 성소수자라는 정체성, 그리고 몸집이 큰 여자이고 강간 피해자인 점 등 자신의 위치성에서 비롯한 입장을 무척 진지하게 여기며 논쟁적인 주장을 하는 한편, 비난받아 마땅한 이들에 대해서도 신중한 숙고를 거쳐 적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글을 쓴다. 이것이 그의 글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


“나는 내 관점을 공유하거나, 참을 수 없는 것 혹은 끔찍한 것에 반대하거나, 열렬히 믿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려왔다. 나는 그런 기회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상상만 할 수 있었던 세상, 내게도 목소리가 있으며 그걸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고 또 내 목소리가 들린다는 걸 나 스스로 아는 세상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_『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18쪽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스로가 주변부의 존재로서 차별과 혐오에 맞서온 만큼 이 책의 첫번째 장을 이루는 정체성 정치는 그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제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에서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도 정체성 정치의 정치적 힘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거센데, 게이는 그러한 흐름을 간과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고 끌어안는 사람이 더 너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담아 정체성 정치의 가능성을 10편의 글로 보여준다. 또, 그가 천착한 주제 중에는 미국의 분열된 정치 환경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정치는 신념과 이념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심지어 탄압하는 사람들로 인해 손쓸 수 없이 망가지고 있고, 미국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국가라면 모두가 이 문제에 봉착해 있다. 또한 여전히 숙고보다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 상황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고난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록산 게이는 나쁜 정치인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비극과 폭력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유권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침을 가한다. 트럼프를 조롱하는 데, 그의 잘못을 가십처럼 소비하는 데 몰두하는 것보다 끝내 절망에 굴복할 수는 없다는 마음, 더 나은 정치인을 뽑을 수 있다는 가능성, 우리 손으로 바꿀 수 있는 작은 행동을 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스스로를 속여선 안 된다. 불만스럽다는 식의 고결함을 내세우며 당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리지 마라. 두 눈을 똑똑히 뜨고 권력을 가진 자들부터 간 커진 추종자들까지 난 쭉 뻗은 길을 보라. 투표할 때 두 가지 악을 놓고 차악을 택하는 거라고 믿는 건 냉소다. (…) 뭔가를 하라. 뭐라도 하라.” _『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102~103쪽


​2016년에 이어 2024년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긴 상황에서 미국 시민은 물론 진보의 가치를 믿는 세계의 많은 이들이 정치에 대한 환멸과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록산 게이는 자신의 블로그 <The Audacity>에 투표 당일과 투표 후에 긴 글을 썼고, 뉴욕타임스에도 칼럼을 썼는데, 이 책에서도 내내 견지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는 외부의 변화, 단번에 주어지는 해결책으로 이 복잡하고 진창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의 불행을 담보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이기심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록산 게이가 66편의 글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 우리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 그걸 두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의견을 벼려야 한다는 요청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구할 수 있으며 구해낼”(114쪽) 수 있다. 정당하게 분노하고 끊임없이 항의함으로써 말이다. 늘 자신의 발언으로 사회에 책임지고자 노력하는 믿음직한 작가 록산 게이. 번역된 그의 책을 모두 읽었고, 각각의 장점이 모두 묵직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지금, “책임감 있는 의견 쓰기란 무엇인가 묻는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책이다. 



“분노는 본질적으로 나쁜 게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분노는 지극히 정상적인, 심지어 건강한 인간 감정이다. 분노를 통해 우리는 불만을 표현할 수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혁명을 일으킬 만한 유용한 분노, 그리고 우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무용한 분노의 차이를 아는 것이다.”_『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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