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한 대로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 새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15년 전에도 매우 시의적인 책이었지만 현시점에서는 필수적인 책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취지로 적은 옮긴이의 말의 일부다...
2003년 가을 처음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은 이후에 자주 한국을 찾아 우리에겐 친숙한 명사 철학자가 되었다. 아마도 대중적 인지도에서 그보다 더 상위에 있을 동시대 철학자는 <정의란 무엇인가>(2009)의 마이클 샌델 정도일 것이다(샌델도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이 있던 2010년에 방한하여 한국 독자들과 만났다). 2012년과 2013년에 연이어 방한했던 지젝은 2016년(경희대 특강)과 2018년(광주 비엔날레)에도 강연차 한국을 찾았고 팬데믹 이후에는 비대면 강연과 칼럼 등을 통해 독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뿐인가. 지난 15년간 국내에서 출간된 지젝의 책은 공저를 포함하면 50권 가까이에 이른다. 지금 시점에서 지젝에 대한 소개가 따로 필요하지 않은 이유다.
다만 2003년 처음 대면했을 때 50대 중반이었던 지젝이 지금은 80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 30대에 그의 책을 처음 읽은 독자가 어느덧 50대 후반이 되었다는 사실은 새삼 감회를 느끼게 한다. 이제 지젝은 61세에 생을 마친 헤겔보다 훨씬 늙은 철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에 대한 감상은 독자만의 것인지도 모른다. 노철학자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지만, 2026년의 지젝은 변함없이 생산적이다(독자로서의 나는 여전히 그를 따라잡지 못한다). 새로운 글들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며 책의 목록을 늘려가고 있다. 지난해말 펴낸 <양자 역사(Quantum History)>만 하더라도 얼마나 자극적인 제목인가. 거기에 더하여 아마도 칼럼 모음집 <자유주의 파시즘> 등이 올해 근간으로 예고돼 있다. 모두가 한국어판으로 나옴직한 기대작들이다. 이런 책들이 대기하고 있음에도 거의 20년 전 책을 다시 펴내고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답변은 그렇다, 이다. ‘폭력‘이라는 화두가 여전히 유효하며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어서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흔히 말하는 대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플랫폼을 매개로 한 ‘테크노봉건주의(Techno-feudalism)’로 탈바꿈했다. 민주주의의 가교로 간주되던 디지털 공간은 일반 지성을 사유화하여 지대를 추출하는 약탈의 장으로 변모했다. 지젝이 구조적 폭력이라고 명명한, 눈에 보이지는 않는 폭력이고 전쟁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폭력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안팎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이 견본이다. 지젝의 폭력론은 이렇듯 눈에 보이는 폭력과 보이지 않는 폭력을 망라해서 폭력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갖게 한다. 지금 <폭력>을 다시 읽는 일은 지젝이 제시하는 폭력의 삼각 구도—주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를 2026년이라는 좌표 위에서 다시 배열하려는 시도가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