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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저공비행
타데우쉬 보로프스키(타데우슈 보롭스키)(1922-1951)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유대인이었고 아우슈비츠 수감생활을 겪었다(1943-45년). 우리에겐 단편과 단편집이 소개됐는데 먼저 소개된 단편(단편집에도 수록)이 폴란드문학선의 표제작, ‘신사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다. 아우슈비츠 방문을 앞두고 다시 펼쳐보았다.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흘러가는 강물처럼 앞으로 앞으로 떠밀려나가는 인파들 사이로 갑자기 한 소녀가 나타났다. 그 소녀는 기차에서 자갈밭으로 가볍게 뛰어내리더니 뭔가에 놀란 사람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부드러운 금발이 어깨 위로물결치며 쏟아져내리자, 그것을 재빨리 뒤로 넘긴다. 무의식적인 몸짓으로 블라우스의 매무새를 고치고는 치맛자락을 아래로 잡아당겨 편다. 잠시 후 그녀는 인파로부터 시선을 돌려, 마치 누군가를 찾기라도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들여다본다. 나도 모르는 새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여보세요. 말해주세요. 저들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나는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 내 앞에 한 소녀가 있다. 매력적인 금발과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바티스트 천(얇은 고급 마직옮긴이)으로 만든 블라우스를 입은 한 소녀가 눈망울에 똑똑하고성숙한 빛을 담고서 내 앞에 서 있다. 여기,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가스실이다. 더럽고 구역질나는 집단적인 죽음이‘다. 또 한쪽에는 수용소가 있다. 빡빡 깎인 머리, 솜을 넣어 누빈 두꺼운 소련제 바지, 불결하고 축축한 여자들의 몸에서 나는 썩은 냄새, 동물적인 굶주림, 비인간적인 노동, 그리고 결국에는 바로 그 가스실, 훨씬 더 끔찍하고, 훨씬 더 무서운 죽음...... 한번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끝이다. 유골이 되어서도 수용소의 철조망을 넘어 저 세상으로 돌아갈 순 없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저걸 차고 왔을까? 어차피 빼앗길 텐데!‘-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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