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림 : 다산책방에서 책을 제공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서평을 작성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런 사실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어떤 '심증'을 갖게 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에 대한 평가와 감상은 어떤 면에서는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음을 고려할 때, 그러한 심증을 떨치게 만들기보다는, 그러한 심증에도 불구하고 제 감상과 평가를 쓰고자 했습니다
줄거리
카지노에 기생하며 사는 이들을 대상으로 돈벌이 하는 '캐딜락 전당사' 직원 장진. 장진은 뜻밖의 사건과 만남을 통해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는 자신의 능력을 서서히 자각한다. 이와 함께 그 능력을 이용하려는 '조직'과 그 능력으로 인하여 지옥 속을 살며 복수심에 불타는 또 한 사람이 추적해온다. 장진은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이용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능력의 힘과 파괴력을 목격한다.
감상
사람이 나고 가듯이 재능이라는 것도 꽃피우다 지는 거죠. 재능이 아니라 저주일 수도 있지만.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111쪽
<내 이름은 망고>(2011), <검은 개>(2019), <월요일의 마법사와 금요일의 살인자>(2020)을 쓴 추정경 작의 장편소설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다산책방)는 '재능' 혹은 '능력', '힘'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장진'이 가진 초월적 능력으로 인해 그 힘의 빛과 어둠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능력을 가진 이가 그 혼자만은 아니고, 그 빛과 어둠의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 그만은 아니지만, 오롯이 장진만이 축복과 저주 사이에서 갈등한다.
내가 보기엔 그건.... 칼이다. 아주 예리하고 위험한 칼. 어떤 사람은 공간을 이동하는 데 쓰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베는 데 쓸 거고, 그 둘의 차이는 크지. 이해 가냐?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91쪽
장진의 보스인 '성 사장'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진의 능력(재능)은 양날의 검이다. 장진이 갈등한다는 것은 그 칼의 양면성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다르게, 소설 속의 어떤 이들(예를 들면 김 사장, 박 원장, 최 상무)은 그 능력을 빌미로 작은 쾌락에 취해 깊은 타락에 빠져들어 저주 속에서 산다.
우리는 흔히 힘과 능력, 재능을 동경한다. 그것들을 가지면, 그것들이 나를 '확장'시킨다고 여긴다. '나'를 넘어서 나보다 더 큰 무언가를 가능케 하리라 생각한다. 내 '욕망',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하지만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의 이야기는 그러한 동경과 열망이 한편에서는 얼마나 나뿐만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들을 위험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힘과 돈이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힘을 이용하여 '돈', '생명'(욕망)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비참함은 심 경장과 한 회장처럼 그 욕망의 의도가 선하든, 그릇되든, 별반 다르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재미있는 점은 성 사장이 말한 그 칼의 능력과 쓰임을 결정하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에게 그 능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어설픈 스승들은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진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면, 결국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칼의 쓰임을 결정한다. 어떤 의미에서 '운명'이란 나와의 인연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고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런 주제들과 의미들은 SF 장르와 잘 어울린다. 때로는 현실의 정밀한 모습은 현실의 비합리성을 목격하는 것에서 드러나기도 하는데, 문학의 영역에서는 SF가 가장 유력한 장르다. 왜냐하면, 아무리 논리성과 합리성을 전제하는 SF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현실의 경계 밖에서만 성립하는 사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의 가독성도 인상 깊다. 쉽고 빠르게 읽힌다. 단문 중심의 건조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흡사 '저널리즘 글쓰기'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다. 이런 속도감 있는 읽기가 가능한 이유 중에 하나는 작가가 이야기를 '설명하기' 보다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책 소개의 'SF 누아르'라는 문구에서 '누아르'라는 단어가 책의 장르보다는 추정경 작가의 문체에 더 어울리는 의미라 생각한다.
이야기의 장르적인 분위기와 빠른 속도감, 문체 등은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이 소설의 장면 장면이 영화의 시퀀스처럼 그려졌다. 영화적인 요소와 사건들이 가득하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로 어떤 배우가 그려지기도 하고, 어떤 배우가 배역을 맡으면 좋을까 생각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추정경 작가. 이번 소설을 통해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내 이름은 망고>로 제4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이 이채롭다. 청소년 문학에서 SF 혹은 SF 누아르까지.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좀 더 찾아 읽어보려 한다. 다음 책은 <검은 개>로.
조수석에 앉은 진은 하늘의 구름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