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이다.
암전은 하나의 연극을 끝내지만, 그 어둠은
다시 시작의 막을 연다.
연기자들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지만, 사실 평범한 사람들도
신이 부여한 "현실"이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에
따른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한다. 물론 깨닫고 있지는 못하지만....
허구와 진실, 그 흐릿한 경계에 선 채 역할극을 충실히 해내는 인물들의 이야기 <fin>
기옥은 한때 유명세를 떨치던 배우였으나 유부남과의 불륜
약물 남용 등의 스캔들을 겪고 나서 대중들로부터 잊힌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을 떠나고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리고 난 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서게 되고 주인공 역할을 맡아
성공적으로 연극을 마치게 된 기옥. 함께 고생한 동료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과 함께 회식을 가지게 되지만, 술만 마시면 어김없이 남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남자 주인공 태인에게 찍히게 되는 기옥. 마시던 와인병을 깨뜨리는 등 난동을 피우는 태인을 향한 분노를 겨우 달랜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자동차 사고로 인해 태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기옥은 망연자실하게 되는데...
소설 <fin>은 연극이 끝나고 난 후에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현실"이라는 또 다른 연극 무대를 비춘다.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여기며 고독하고 우울하게 살아가는, 한물간 여배우 역할에 충실한 기옥과 욕망을 감춘 채 기옥의 최고 돌보미 역할에 몰입하고 있는 윤주 그리고 억눌린 채 불쑥불쑥 올라오는 분노를 감추고 착한 매니저라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 상호...
그러나 이 소설에서 최고의 연기자는 바로 우태인. 그는 역할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아예 현실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영화나 연극 속 등장인물에게 빙의한 나머지 "자아" 마저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사람.. 매니저인 상호와 대사 연습을 하다가 나오는 이 대사가 태인의 상태를 너무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안개는 살아 있어. 안개를 조심해야 해.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자세히 보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는 사라질 거야. 가만히.
사라지는 줄도 모른 채 스르륵, 없어져 버린다." -111쪽-
연극 무대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삶이라는 무대에서도 영원히
내려오길 바랐던 걸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태인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내뱉는 대사들은 "맥베스"에 나오는 독백을 변형한 것이라고 하는데 스스로의 죽음조차 연기가 되길 원했던 한 남자의 광기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의 배우에 불과한 것...
이 책을 읽고 나니, 유진 오닐의 작품 <밤으로의 긴 여로>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적이면서도 강렬한 작품인 소설 <fin>을 추천한다.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