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낡고 벌거벗은 시간 위에
생이 자꾸만 비틀거린다
바쁘게 살아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인생의 전성기는 지나가고 자꾸만 과거를 곱씹는 나이가 되었다. 너무 예민하고 불안했던 젊은 날이었기에 오히려 약간은 감각이 둔감해진 요즘이 나는 더 좋다. 나는 아직 정년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다가올 미래이기에 누군가가 맞이할 정년이 궁금했다. 이 책 [정년, 그 깊은 독백]은 한 직장에서 30년 넘기 근무한 박갑성 저자의 책이다. 치열하고 경쟁적인 회사라는 조직에서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었다는 건 저자가 남다른 인생관과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내 예상대로, 책에서 마치 향기가 난다고 느껴질 정도로 깊고 은은한 글솜씨가 빛나는 책 [정년, 그 깊은 독백]
이 책은 일종의 에세이이고 내면을 들여다보며 성찰하는 명상서적에 가깝다. 프롤로그 후에 이어지는 글은 여름에서 시작하여 겨울로 끝을 맺는다. 2024년 7월에 정년을 앞두고 있는 저자는 2023년 7월부터 매일 한 꼭지씩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각 글의 주제는 인생, 가족, 직장 생활 등등 다양하고 각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 느낌, 기억 등등이 잘 내린 커피향처럼 은은하게 풍긴다. 아이 셋을 키우느라 고생했을 아내에 대한 미안함,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한 어머니,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 등 특히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이 두드러지는 글이어서 좋았다. 그뿐만 아니라 직장 동료들의 고충을 잘 들어주는 인간적인 상사란 느낌도 받았다.
저자가 젊은 시절에 아마도 시인을 꿈꾸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글을 구성하는 언어가 아름답고 표현력이 뛰어나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5시에 출근할 만큼 정신없이 바쁜 직장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꾸준하게 이렇게 좋은 글을 써오셨다는 게 놀라웠다. 표현이 아름답고 닮고 싶은 인품이 묻어나는 책인 만큼, 발췌하고 싶은 대목들도 많았는데, 예를 들자면 33쪽 "가까운 사람일수록 호저의 거리가 필요하다. (...)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중요한 행위이면서 보석처럼 아름다운 일이다." 나 38쪽 "삶의 버거움을 느낄 때, 버거움을 뛰어넘는 고통으로 행복해지는 들숨과 날숨, 절망은 생각보다 쉽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와 같은 구절은 삶에 다소 회의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힘이 있다고 느꼈다.
가족과 직장 외에 저자가 관심을 가진 영역이 바로 "등산"이라는 것을 알아챌 만큼, 이 책에는 산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아마도 매 순간 등산하듯 살아오신 분이라서 산에 끌리지 않았나?라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73쪽 "맨발로 지양산을 걸었다. 길 위에 밤송이가 떨어져 굴러다니고 가을 향기가 산을 덮자, 사람들의 얼굴에 가을이 물든다." 와 91쪽 "가을 단풍은 머리 위로 내려앉아 있고, 바람이 불면 자작나무는 하얀 속살을 드러내어 순백의 세상을 보여준다"와 같은 구절은 울긋불긋한 색깔로 가을을 드러내는 산의 경치를 잘 묘사한다는 느낌이다. 책의 중간중간 계절을 보여주는 예쁜 장면들을 찍은 사진들도 있어서 글들이 좀 더 돋보인다.
프로필에 저자의 고향이 경남 남해라고 소개되어 있다. 나와 신랑은 휴가 때마다 가고 싶은 지역으로 꼭 남해를 고른다. 바다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남해 지역 출신이라 그런지 저자의 글에는 자연이 숨어 있다. 회색빛 도시 속에서 벼가 익어가는 풍경을 찾아내고 시간을 내어 한양도성 근처 길을 걸으면서 오래된 경치를 만끽하는 저자. 그 와중에 저자는 생과 사를 고민하고 삶의 무게와 존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디지털 세상으로 점점 굳어지는 한국, 그리고 대도시 서울 안에서 삶을 노래하는 음유 시인이라는 느낌도 들었달까? 하여간 상당한 문학적 재능이 있으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정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실 것 같은 박갑성 저자의 에세이 <정년, 그 깊은 독백>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