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잘사는 사람이 재빨리 집단 농장에 들어와서 그대로 있는 예도 있었다. 반면에 가입 신청을 하지 않은 고집 센 가난뱅이는 강제로 이주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꿀라끄 박멸>이 아니라 집단 농장으로의 강제 가입이었다. 혁명에 의해 주어진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빼앗고, 그 토지에 사람들을 농노로 묶으려면 죽음을 가지고 위협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제2의 내전이며, 이번에는 농민과 싸우는 내전이었다. 이것은 <위대한 전환기>, 또는 글자 그대로 <위대한 단절기>였다. 이 시기에 무엇이 두 동강 나서 끊어졌는지는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러시아의 등뼈였다.
- P42
자유를 옹호하는 서방의 <좌익> 사상가들이여! 좌파 노동당원들이여! 미국, 독일, 프랑스의 진보적인 대학생들이여! 당신들한테는 이것으로 아직 부족하겠지. 당신즐은 나의 이 책만으로는 아직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손을 뒤로 돌려라!>는 명령이 있을 때, 당신 <자신>이 우리 나라의 수용소군도에 발을 들여놓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한 번에 알게 될 것이다.
- P322
1930년대 초에 체르딘스끄 지방에 유배된 사회주의자들은 완전히 저항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왔다고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현실적인 희망은 ‘새로운 형기’를 추가할 때 다시 체포되지 않고 바로 ‘서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중략) 우리는 부서지고 갈기갈기 찢긴 분자들이었지만 도형 수용소를 거쳐 강력한 단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한때 분명한 단일체였던 사회주의자들이 거꾸로 무방비한 분자로 흩어지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사회생활이 확대와 충만으로 향하고 있는 데 비하여 그들의 시대에는 억압과 축소로 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우리 세대는 그들 세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이다.- P31
1941년에 벌거숭이 상태로 강제 이주된 이래, 근면하며 피로를 모르는 그들은 조금도 낙담하지 않고, 그곳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꾸준히 일하기 시작했다. 이 지상에 독일인들이 푸른 땅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사막이 있겠는가? 옛 러시아 속담에 ‘독일인은 버드나무처럼 어떤 땅에 꽂아도 이내 뿌리를 내린다.’고 했는데, 정말 그대로였다. 탄광이건 기계트랙터 공급처건 국영 농장이건 어디서나 책임자들은 독일인들을 칭찬했다. 독일인보다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 P109
그리스인도 열심히 일했다. (중략) 밭이나 소에 대해 말한다면 독일인들을 따라잡을 정도였다. 까자흐스딴 지방의 시장에서 제일 맛있는 연유나 제일 좋은 버터나 채소는 모두 그리스인들이 팔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도 까자흐스딴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들의 강제 이주는 훨씬 일찍부터 실시되었고, 1950년대 초에는 상당히 자유롭게 되었다. (중략) 그들은 교육열이 높아서 재빨리 까자흐스딴 지방의 교육 시설을 점령하고 (이미 전쟁 때부터는 그들을 막을 장애물이 없었다) 공화국의 지식인층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P109
그런데 전혀 복종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민족이 하나 있었다. 몇 명의 반란자가 아니라, 민족 전체가 그러했다. 바로 체첸인들이었다. (중략) 특별 이주자들 중에서 체첸인들만이 정신적으로 진짜 ‘제끄’였다. (중략) 체첸인들은 어디서나 당국을 즐겁게 하거나 당국의 마음에 들 일은 하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가슴을 펴고 살며, 그 적의를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중략) 그들은 가축을 훔치고, 집을 털고, 때로는 강도짓으로 물건을 빼앗았다. 그들은 현지 주민이나 쉽사리 당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유형수들을 자기들과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존경하는 것은 반란자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구나 그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들의 이러한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미 30년간에 걸쳐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도 강제로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 P110
본토의 아이들은 이미 공부에 흥미를 잃었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일종의 의무며,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 어디엔가 적을 두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유형지 아이들의 경우에는 지도만 잘 한다면 공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인생의 모든 것이 되었다.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그들은 마치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2류의 입장을 벗어나 1류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실한 공부를 통해서만 그들의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었다. - P151
학교에서는 원하는 대로 수업 시간을 오전이나 오후로 맡았고, 나는 그 수업으로 항상 행복했으며, 괴로운 것도 피곤한 것도 없었다. 또한 매일 글을 쓰기 위해 1시간쯤 시간을 낼 수도 있었다. 그 1시간 동안, 나에게는 정신적인 긴장도 필요하지 않았다. 책상에 앉으면 펜 밑에서 문장이 흘러나왔다. 집단 농장에서 사탕무 수확에 동원되지 않는 일요일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줄곧 쓰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나는 장편 소설을 쓰기도 했으며, 앞으로 오래 써도 다 쓸 수 없을 재료가 있었다. 출간에 관해서라면, 어치파 내가 죽은 다음에 발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67
그는 1944년에 내가 스딸린에 대해 쓴 해학에 웃음까지 지었다. "참, 이것은 바로 지적했군요!" 조서에 딸려 있는 죄를 입증하는 증거물 중에서 전선에서 쓴 나의 단편 소설을 보고 칭찬했다. "이 속에는 반소비에뜨적인 것은 하나도 없더군요! 원하신다면 가져가도 좋아요. 발표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나 나는 환자처럼 기어드는 목소리로 거절했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문학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만일 제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산다면 물리학을 공부해 볼까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유행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매를 아끼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감옥은 나름대로의 지헤를 우리한테 가르쳐 주었다. 체까 GB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 P173
나는 이 힘찬 종족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종족은 아니었으나 종족이 되었다! 서로가 모두 두려워하던 사회의 황혼이나 분산 상태 속에서, 우리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강하게 단결되어 있었다. 사회에 나오자, 정통파 공산당원이나 밀고자들은 자발적으로 우리에게서 이탈해 갔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기 위해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시험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만나서, 서로 눈을 바라보며 몇 마디 건네면 다음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이제 도울 용의가 있었다. 우리는 어디나 동료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수백만에 달했다!- P200
역사는 한 번도 과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역사는 더욱 그렇다. (A. 꾸즈민)
역사는 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충성파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미래인가?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이런 모든 그들에게,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의 무지에 대하여 대체 어떤 반론을 하면 될까? 이제 그들에게 어떤 설명을 하면 되겠는가?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움이 많고 얌전해서, 거짓이 뻔뻔스럽게 날뛰는 사이에도 잠자코 있게 마련이다. - P220
죄수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킨다고? 그것은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수용소 주변에 살고 잇는 자유인들이 죄수들보다도 나쁜 생활을 하게 되니까, 그런 것을 절대 허가해서는 안 된다. 소포의 횟수를 늘리고, 그 중량을 더한다고? 그것은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수도에서 식료품을 사지 못하는 교도관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략) 수용소 군도는 이미 존재했고, 수용소 군도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수용소 군도는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진보적 교리’의 잘못을 대체 누구한테 덮어씌울 수 있겠는가?인간은 반드시 틀에 맞게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에 탓을 돌릴 것인가?-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