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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막대한 부의 상속인이 된 어린 여성, 그를 착취하고 이용할 궁리만 하는 후견인, 그리고 예정된 부당한 결혼. 수도원에서 예정된 결혼식 전날 오만한 남작이 주검으로 발견된다. 바로 전날 그에게서 해고된 향사가 갑자기 도둑으로 지목되고 그는 사람들이 접근하길 꺼리는 장소에 몸을 숨긴다.
우연의 일치치곤 참으로 묘하게도 어린 신부를 곤혹스럽게 만든 이들만이 희생자가 된다. 그럼에도 살해 방법은 수수께끼고 진범의 행방 또한 묘연하다. 나환자들의 요앙소인 세인트자일스 병원에서 봉사하고 있던 마크 수사가 결정적인 증언으로 도망자의 누명을 벗는데 도움을 준다.
남다른 기운을 내뿜던 노인의 정체가 밝혀졌을 땐 한동안 잊힌 존재였다가 어느 날 모험을 마치고 돌아온 영웅 신화의 한 장면이 연상되기도 했다.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위한 마지막 일을 마치고 홀로 길을 떠나는 모습이 쓸쓸했지만 헤어짐 뒤에 이어지는 문장 덕분에 그의 뒷모습이 더욱 숭고하게 느껴졌다.
정해진 길을 따라 목적을 가지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이, 서두르지 않되 그렇다고 지체하지도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숙명과도 같았다.
엘리스 피터스 『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 (북하우스, 2024)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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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출판사의 SNS 계정을 찾아보고 내가 놓친 정보가 있는 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래는 북하우스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 캐드펠 수사 시리즈 기본 판본과 다른 점 (출처 : 북하우스 공식 트위터)
1. 1권, 2권, 5권 제목을 영어 원제에 가깝게 바꿨습니다.
2. 시리즈 순서를 알기 쉽도록 각 도서에 번호를 붙였습니다.
3. 정확하면서도 잘 읽히도록 교열하면서 기존 판본의 오류들을 잡고, 인명/지명을 현재의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1번과 2번의 개선점이 마음에 든다. 특히 1권의 제목은 기존 제목보다 훨씬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이어서 더 좋았다.
(순서대로 구판 → 개정판)
1권 『성녀의 유골』 →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2권 『99번째 주검』 → 『시체 한 구가 더 있다』
5권 『죽음의 혼례』 → 『세인트자일스의 나환자』
3번의 개선 사항도 물론 환영한다. 하지만 오류가 종종 눈에 띄어 표지만 새로 입히고 원고 검토는 생략한 줄 알았다. 교열하면서 기존 오타를 놓친 것인지 이번 판에서 새로 발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정판의 옥에 티* 같아 아쉽다.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서 이 모든 걸 새로 반영한 판이 또 나왔으면 좋겠다.
* 작가소개의 연도 오류, 드라마 제작 방송국 불일치, 본문의 오탈자, 주석 누락, 중세 지도상의 표기와 본문 표기의 불일치 등
∎ 추천 사유 1 : 재밌으니까
시리즈물의 특성상 에피소드마다 완성도와 재미의 편차가 있을 법한데 다섯 권을 읽는 동안 그런 아쉬움은 느끼지 못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첫 권을 읽었을 때 싹튼 기대는 내내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다음 이야기를 읽을수록 점점 좋아졌다.
사람마다 자신이 선택한 소설에서 기대하는 바가 다르고 특히 취향을 많이 타는 장르라는 걸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떻게 구슬려도 ‘그 장르 내 취향 아님’으로 무장한 독자를 설득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번은 권하고 싶다. 재밌으니까.
내가 이 장르를 처음 접했다는 점에서 비교 대상 자체가 없기에 신빙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재미의 본질을 핑계로 그냥 우기고 싶다. 재미만큼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권하고 싶다. 재밌으니까.
∎ 추천 사유 2 : 질문에서 해방
왜 좋았나? 정의는 살아있다는 이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서. 진실에 불을 밝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희생자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주니까. 어릴 적 읽었던 전래동화도 이런 모양새였다. 꼬여있던 오해가 풀리고, 억울함이 해소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남은 이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야기.
개운한 마무리가 오히려 약점일까? 결말이 깔끔해서 읽은 후에 사뭇 심란한 숙제**를 독자에게 남기지 않는다. 질문이 남지 않는 것, 독서 후 독자의 생각과 삶이 이전과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기준으로 진정한 독서의 가치를 논한다면 아마 순전히 오락의 기쁨만을 선사하는 소설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사회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삶은 왜 모순으로 가득한지, 희망은 있을지 따위의 질문
그럼에도 우리는 늘 의미만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맘 편히 현재를 즐기는 순간도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순간을 함께하기에 좋은 책이다. 정형화된 결말이 식상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건 결말이 아니라 시종 우리는 붙드는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닐까.
다섯 편의 리뷰를 준비하면서 개정판의 다양한 부분을 조목조목 살펴보기 위해 노력했다. 구판과 달라진 점, 워크룸의 표지 디자인, 추리문학상과 저자가 해당 장르에서 차지하는 지위, 중세물의 클리셰, 독초에 관한 짧은 정보 등 겨우 맛보기로 찾아봤을 뿐이지만 스스로 찾아 정리했다는 데에 만족을 느낀다.
한때의 영광이 무색하게 그 명성이 후대의 독자까지 이어지지 않는 작품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시간의 검증을 거쳐 현대의 독자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야기는 그래서 더 놀라움을 준다. 허브향에 취해 여름밤을 새우던 나는 이제 오매불망 후속편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리뷰가 끝에 다다른 이 순간,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가 가장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 네이버 이북 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