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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랑의 실천으로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시작한 기록이자 삶의 흔적을 모아 잊힐 위기에 처한 이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시도다. 이 시도는 실패가 자명한 도전이고 세상을 먼저 떠난 자의 궤적을 따라가는 과정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외면했던 죽음에서 오래된 상처를 발견하고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관찰 속에서 자신 또한 비슷한 상처를 억누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의 고통은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신체기관을 가진, 같은 고통을 공유하는 존재들은 힘겹지만 당연하게도 서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슬픔을 살피는 과정은 나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타인의 슬픔과도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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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말들』의 저자 조소연은 13년간 문학·인문·예술 분야 편집자로 일했다. 2018년 자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죽음을 직시하며 1년여간 이어진 쓰기는 창작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되었고 제11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어머니의 자살이 나의 삶에 미친 영향과 그 상실의 폐허 위에서 그녀의 삶을 재건하고자 하는 이야기"(296쪽)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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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자연스레 내 인생에서 마주한 죽음 또한 돌아보게 된다. 사고도 병사도 자살도 모두 보았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임에도 자살에는 왜 이리 더 크게 마음이 동요하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연예인의 자살 소식에도 오래 떠올리고 심장이 떨어질 듯이 충격을 받는 나로서는 이런 주제를 피하는 것이 온당할 터인데 왜 나는 계속 이런 목소리를 찾아 읽는 것일까.
그것은 부재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내가 부재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흔적과 유해를 낱낱이 그러모아 그 형상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조소연 『태어나는 말들』 (북하우스, 2024) 50쪽
치욕을 이기는 건 사랑이다. 이제는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멈추지 않는 일은 사랑의 한 방식이다. 기억함으로써 생의 소멸에, 냉혹한 망각에, 삶의 치욕에 저항한다.
조소연 『태어나는 말들』 (북하우스, 2024) 184쪽
이런 마음과 작가가 끝없이 진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닿아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폭로처럼 느껴지는 이 이야기의 여정이 어디로 향할지 가슴 졸이며 따라가게 된다. 어떤 진실에 가닿을 수 있을까. 상처를 깊이 들여다보고 소리 내어 말하고 글을 토해내며 다다를 결말은 어디일까. 작가는 기억하기가 사랑하기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이 정말 글쓴이를 위한 여정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상처를 끊임없이 들추고 살피는 일이 빛을 보여줄지 나 또한 두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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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함으로써 나의 병듦을 비로소 인식했으며, 그것으로부터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아픈 몸과 영혼마저도 내 삶의 일부로 끌어안기 위해 나는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소연 『태어나는 말들』 (북하우스, 2024) 179쪽
어머니의 유해를 끌어모아 재배치하며 죽음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어쩌면 실패할 것이 자명한―를 이어가며 저자 또한 자신이 방치해 온 상처 조각들을 발견한다. 나 또한 조각난 채 삶을 이어오고 있었음을, 어머니가 넘어간 저 죽음과 내 삶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을, 죽음이 내게도 굉장히 가까운 조건임을 깨닫는다. 그 지점에서 허무를 마주하고 포기를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멈추지 않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기를 택한다.
그들이 새끼를 낳고 품었듯이 나는 당신을 낳고 품을 것이다. (…) ‘히스테리’라 불렸던 당신의 고통에 대해서, 나의 고통에 대해서, 여성의 고통에 대해서 말할 때가 됐음을 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이 자궁에서 연유한다는 이상하고 기이한 역사에 대해서.
조소연 『태어나는 말들』 (북하우스, 2024) 121쪽
중간에 갑자기 자궁 질환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는 것에서 조금 뜬금없음을 느꼈는데 그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의 공통점, 여성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고통, 두 여성이 공유하는 고통의 출발점을 찾아내는 시도로 보였다. 어머니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여성인 내가 유일하게 어머니와 연결되는 장기, 자궁에서 이야기는 새로 태어난다. 자궁의 질병, 공포, 고통. 오랜 세월 치유의 손길에서 소외된 자궁에 대한 술회는 억압받고 금기로 치부된 여성의 욕망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된다.
고립된 삶에서 탈출하려 몸부림 친 여성의 죽음을 밝히다가 자궁 질환에 대한 이야기로 선회하며 여성 독자에게 좀 더 호소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시도에서 ‘아 이건 치트 키 아닌가?’ 싶다가도 그래서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극은 어쩌면 계속 반복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시대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이 비극에서 어떤 여성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해주는 듯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여성만이 진지하게 이 이야기에 초대받은 독자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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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구체적으로 납득하기 시작할 때, 자신을 옥죄던 내부의 결박에서 풀려나 비로소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내 미지의 세계는 타인과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그 통로에서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는 민감한 촉수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이 통로의 존재가 선명해질수록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공통체적 감각을 살려낼 수 있게 된다.
조소연 『태어나는 말들』 (북하우스, 2024) 199쪽
조심스러운 주제인 만큼 오래 고민하고 숙고하여 적은 듯한 문장들, 밀도 높은 생각의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입을 여는 책의 초반부는 정말 숨이 막힐 듯 했다. 책은 마치 다시 태어난 자가 숨을 되찾는 과정 같았다.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침묵 속에 호흡마저 잃을 뻔한 신체가 한계까지 참은 숨을 뱉는다. 처음은 폭발할 듯 거칠게 몰아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숨은 잠잠해지고 자연스러운 리듬을 되찾는다. 몸은 자연의 흐름에 맞게 자기의 자리를 되찾는다. 고통을 비우고 태어난 신체는 비로소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할 준비를 마친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동안 살아 있게 된다. 질문함으로써 죽음을 유보한다.
조소연 『태어나는 말들』 (북하우스, 2024) 218쪽
자신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에 자리한 무수한 타자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타인의 슬픔은 가닿지 못할 영원한 불모의 땅이 될 것이기에.
조소연 『태어나는 말들』 (북하우스, 2024) 259쪽
1부은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된 의문과 억압된 여성의 삶, 고립되기 쉬운 여성의 상황과 환경을 돌아본다. 2부는 자궁을 중심으로 고통의 여정을 좀 더 깊숙이 따라가며 저자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를 발굴해 나간다. 3부에서는 고통을 마주하는 글쓰기가 가져온 변화와 회복의 과정, 나아가 다른 상처와도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질문을 이어가고자 책 속에서 파묻혀 있는 듯 했던 글쓴이는 3장에서 돌연 바다 앞에 선다. 갑작스러운 배경 전환. 어두운 미궁에서 함께 그의 뒤를 종종 따라 걷던 독자도 함께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 앞에 선다. 어머니가 자신을 추방한 모성의 세계는 산으로 상징되고 책의 후반부에 저자가 다시 태어남을 경험하는 공간은 바다로 상징된다. 이 대비가 극적이다. 긴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좋은 장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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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과 대체 의학을 통합한 관점에서 여성 질환을 연구한 크리스티안 노스럽을 인용하며 난소 왼쪽을 설명한 부분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성주의적 시각을 반영했다는 책을 읽다 보면 유달리 ‘대안’, ‘대체’, ‘해체’ 등을 개념을 적극 포섭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데 이것을 ‘모성적’ 포용의 실천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가부장적인 주류 시스템 바깥을 탐구하고 새로이 개척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리송하다.
가끔 정말로 사이비처럼 보이는 이상한 주장을 옹호하는 책들을 만나게 되면 당황스럽다. 이것 역시 내가 주류의 사고방식에 오염된(?) 시각으로 판단하기 때문일까? 고정관념을 전복하려는 다양한 시도와 해석은 환영하지만―이런 단서를 다는 것에서부터 망한 변명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주류를 벗어났다는 특성 하나만으로 주목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에는 왠지 거리를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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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새로 시작하는 제목 페이지 하단에 다음에 이어질 글을 예고하는 키워드가 실려있다. 단어의 뜻은 사전적 의미나 어원을 살필 때도 있지만 대부분 저자가 글쓰기 여정에서 발견한 의미로 다시 쓰인다. 깊은 사유의 바다에서 퍼올려 말리고 정갈하게 다듬은 정의가 『태어나는 말들』 이라는 제목의 책에 어울리는 구성 요소라고 생각했다.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인용들이 꽤나 적절해서 책을 읽다 말고 당장 인용된 책을 먼저 찾아 읽고픈 충동도 들었다. 편집자이자 오랜 기간 작가를 꿈꿨던 저자가 수집한 문장들이 적재적소에 자리 잡고 있다. 인용한 책 목록이 맨 뒤에 참고 자료로 잘 정리되어 있는 점도 섬세하게 느껴져 좋았다. 어쩐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용기 내어 글을 쓰고 싶어지는 책이다. 비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지는 책이다.
추천하고픈 사람
‘말할 수 없는 죽음’으로 여전히 침묵 안에 있는 자살생존자(자살자의 유가족)
자궁 질환으로 고통 받은 여성을 아는 사람
오래된 상처를 정리하고 싶지만 막막한 사람
죽음에 대한 생각에 오래 사로잡힌 적 있는 사람
욕망에 솔직한 여성을 마주하면 당황하는 사람
제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치유로 나아가는 글쓰기를 실험 중인 모든 글 쓰는 사람들
참사의 희생자를 조롱하는 인간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람
여성의 내재된 고통과 공포, 억압이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픈 남성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 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