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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수바드라 다스Subhadra Das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과학사와 철학사를 전공하고 현재 동 대학교 박물관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적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역사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권력이 조작하고 숨긴 역사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저자가 펴낸 첫 책이다. 세계사를 사건 또는 인물 중심으로 펼치지 않고 상식처럼 널리 퍼져있는 개념과 생각을 중심으로 풀어내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소개하고 있다. 나 역시 당연한 통념 이면의 숨은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지 묻는 책 소개에 큰 흥미를 느꼈다.
‘역사적인 주장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역사학자의 역할’(16쪽)이기에 저자는 그간 서양이 만들어 낸 ‘문명’과 그것을 떠받친 온갖 이상과 진보적 가치들 중 널리 알려진 10가지를 뽑아 분석한다. ‘서양 문명이란 현실을 누르고 브랜딩에 성공한 사례’(17쪽)이자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문명화라는 사명’을 내세운 식민 국가들의 비전이자 변명에 불과했음을 밝혀나간다.
문명화된 그 모든 것들의 반대편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비문명적인 사물과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수바드라 다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2024, 북하우스) p.12
저자가 몸담고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교육용 박물관 저장고에 있는 한 철제 상자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과학이라는 굳건한 요새 뒤에 숨은 인종주의, 우생학을 조명하고 식민국가의 잔인한 토벌과 노예제, 계급의 역사를 살핀다. 고전이라는 것을 정하고 그 가치를 추켜세워온 인물들이 사실상 백인 남자들 분이었다는 사실을 짚는 것도 잊지 않는다.
교육이라는 정신적 종속, 알고 보면 평등한 적 없던 법, 소수의 기득권만을 위한 정치, 과학적 경영의 탈을 쓴 착취, 국민의 선별적 보호와 배제, 예술과 문화제 독점 등 자신들이 곧 세계의 기준이자 선두의 ‘문명’이었기에 침략하고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맹신한 백인들의 자기 세뇌가 불러온 처참한 결과와 현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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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이미지 속에서 문명을 일굴 때면, 다른 문화에 있는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희생되는 것 같다.
수바드라 다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2024, 북하우스) p.115
저자는 서구 열강이라는 제국과 약하고 운이 없었던 피식민지의 구도로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는다. 강자와 약자의 대비를 강조하는 서술 방식은 강자가 남용한 권력의 힘을 부각하여 비판에 더욱 힘을 실으려는 의도와 달리 자칫 결과에 대한 정당성 부과라는 왜곡된 결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양 문명을 비판하며 취하는 태도는 ‘너희 정말 잔인하고 무섭구나.’ 라기 보다 ‘너희 정말 한심하고 안타깝다.’에 가깝다. ‘뭐라도 되는 양 어깨에 힘주면서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더니 정말 생각도 짧고 시야도 좁구나. 그렇게 오만 잘난 체는 혼자 다하더니 아주 그냥 깡그리 망쳐놨구나.’라는 톤으로 읽혔다.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Uncivilised : Ten Lies That Made the West』 이다. 책의 내용도 ‘문명’의 주인이 누구이고 누가 그것으로 이득을 얻는가, 누가 문명을 주입하고 세계 곳곳에 그럴싸한 브랜드로 자리 잡도록 주도했는가를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다. 문명과 야만 같은 대립이 자주 등장하며 그 자체가 책의 주요 키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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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제목은 원제의 부제를 그대로 옮긴 격이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현대 문명의 본질과 허상을 단숨에 꿰뚫는 세계사』 라는 한국어판 제목과 책등에 적힌 부제를 보고 든 첫 인상은 ‘참 길다.’ 였다.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상세히 전하고픈 의도였을까? 나는 제목이 아쉬웠다.
일단 원제만큼 머리에 선명하게 남지 않는다. ‘세계를 움직인’이라는 수식 또한 왠지 낡은 인상을 준다. 딱 저 문구로 인터넷 서점에 검색해서 나오는 책들의 표지와 출간 연도를 살펴보시라. 책장을 펼치기 전부터 진부한 느낌이 감돈다. 제목도 표지 디자인도 원작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24년 2월에 발간된 책이 이렇게 금방 번역되어 나온 것에 놀랐다. 시의성이 중요한 책이어서 서둘러 내놓은 것일까? 그럴만한 이슈가 무엇이 있나 돌아보았으나 잘 모르겠다. 빠르게 선보이느라 제목과 표지 디자인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나? 책의 내용이 좋은데 너무나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고 있어서(온통 빨간색으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다.
책은 서양의 악행과 만행을 고발하는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거울삼아 지금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그동안 간과했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세상의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앞으로 지향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지 독자에게 여러 질문을 남긴다.
나는 특히 고유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간 민족들의 얘기가 와닿았다. 그저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인데 서양 문명이 일방적으로 부여한 야만과 미개라는 낙인 아래 세상을 떠난 사람들.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검토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미지의 선택지들이 궁금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가 귀 기울여야 할 곳은 어디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추천하고픈 사람
모름지기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생을 착실하게 살아왔다 자부하는 사람
박물관과 미술관을 자주 찾는 문화 애호가
민주주의의 부작용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
세계사 비화를 즐겨 읽는 사람
개인의 노력만으론 결코 넘지 못할 벽을 느껴본 사람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 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