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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리처드 홀먼Richard Holman은 작가, 강연가, 크리에이티브 코치로 내셔널지오그래픽, 워너브라더스, 아이맥스, 펭귄랜덤하우스, BBC 등 세계 각지에서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왔다. 아티스트, 작가, 디자이너들을 초대해 이야기 나누는 팟캐스트 채널 <The Wind Thieved Hat>을 운영하고 있다.
나도 이런 내가 피곤해!
이 책은 그간 저자가 보고 듣고 읽고 접한 골치 아픈 창조적(?) 악마들을 10가지 유형으로 설명하고 그들을 물리치고 창조의 여정을 멈추지 않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창조라는 말의 무게 때문에 오로지 예술가를 위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비단 예술 작업 뿐만 아니라 자기만 볼 일기 한 줄, SNS에 남길 한 마디 감상조차 시선을 의식하며 자기 검열의 날을 세우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내용이다.
Creative Demons? 창조적 악마?
창작자의 의욕을 갉아먹는 ‘악마’같은 존재에게 ‘창조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 흥미롭다. 창조의 불꽃이 반짝 빛날 때만 깜짝 등장하는 존재에게 어울릴 만한 꾸밈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훼방 수법의 다양함이 실로 창조적이라는 말 밖에 설명할 길 없을 정도로 고약하기에 붙인 반어적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빌런 없는 히어로는 무슨 재미
끊임없이 창작자의 발목을 붙잡는 악마들이 하필 창작의 순간에만 등장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이름처럼 다양한 가면을 돌려가며 창의적으로 창작자를 괴롭힌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악마’라는 이름이 퍽 어울린다. 여름밤 귓가를 맴도는 보이지 않는 한 마리 모기처럼 성가시지만 그 덕에 여름을 상기하는 것처럼 창조적 악마라는 건 창조 행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죽이지는 말고 길들여보자
저자는 창작자라면 누구나 언젠가 이 악마를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큰 고난 없이 곧장 성공 가도를 달려온 것 같은 위대한 거장들도 저마다 방해꾼의 목소리를 극복하며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왕 반드시 맞닥뜨릴 존재라면 슬기롭게 잘 길들여서 깐깐한 조력자로 써보자고 설득한다.
제목을 보고 떠오른 것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가 떠올랐다. (원제:The Artist’s Way: A Spiritual Path to Higher Creativity(1992년))로 예비 창작자라면 한 번쯤 추천 받았거나 읽어보았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어판은 2012년에 나왔고 현재 절판되었지만 예술 전공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슬럼프에 빠진 창작자들에게 서로 권하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창조성 회복 프로그램 강의노트에서 비롯한 12주간의 워크숍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실제 훈련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책이다.
『크리에이티브 웨이』는 『아티스트 웨이』와 같은 워크북은 아니지만 그 영향력을 의식하여 지은 제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표지 하단에 적힌 ‘세상 모든 크리에이터를 위한 창조력 회복 비법서’라는 말도 ‘창조성 회복 워크숍’을 연상시킨다. ‘도둑맞은 창조성을 되찾는 10가지 방법’이라는 부제 또한 2023년을 뜨겁게 달군 책 『도둑맞은 집중력』을 떠올린다. 여러모로 전략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쁘다기보다 그만큼 타깃 독자가 어떤 것에 익숙할 지 고민한 흔적으로 받아들였다.
아멘 브레이크와 감자 예수
개인적으로 도둑질의 악마에서 언급한 아멘 브레이크 Amen Break가 반가웠다. 정글/드럼앤베이스 팬으로 이 비트가 가진 상징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이것을 연주한 밴드의 드러머는 이 창작물을 통한 어떠한 저작권료도 받지 못했고(책에는 단 한 푼의 로열티도 받지 않았다고 썼지만) 홈리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얘기는 누락된 점이 아쉬웠다. 기꺼이 쓰라고 흔쾌히 프리 소스로 푼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사연이 알려진 후 모금을 통해 밴드의 다른 멤버가 보상을 받긴 했지만 기여한 곡 수를 고려하면 턱없이 적은 보상이었다. 당시의 저작권 의식은 안타깝지만 여전히 이 6초에 얼마나 많은 곡이 빚지고 있는지는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감자 예수 사례 또한 당시 세간의 화제였다. 사건의 심각성 때문에 화제였다기 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자아냈던 걸로 기억한다. 저자는 실패의 악마를 언급한 장에서 끝내 예수상을 원상 복귀하진 못했지만 그 지역 관광객이 늘어 잘 됐다는 식으로 해석했지만 나는 비난 여론에 살이 17킬로그램이나 빠지고 그 뒤로 종적을 감춘 여성의 삶은 뒷전인 듯한 서술이 조금 못마땅했다.
실력 없이 의욕만 앞선 아마추어의 실패 사례가 창작자의 실패 극복 사례로 적합한가? 어쨌든 지역 사회에 기여했으니 개인은 욕먹었을지언정 잘 된 거라는 의미인가? 사실 이 부분은 내내 농담조여서 우스개인가 보다 하며 읽긴 했으나 이것이 정말 창작자 개인에게 전화위복인 사례인가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내가 언급한 두 사례로 이 책 전체의 의도를 오해하는 이는 없길 바란다. 두 가지는 개인적으로 떠오른 바가 있어 적은 것이고 다른 부분에선 침착하게 악마들을 분석하고 극복할 방법을 제시한다. 매 장 새로 시작할 때마다 ‘OO의 악마를 무찌르는 법’이라고 장식했지만 사실 책을 읽다 보면 이 악마들을 죽이고 없애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저자가 나가는 장에서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문단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 책의 성격을 요약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완전히 적절하지는 않은 듯 하다.
‘창조적 악마와 그들을 죽이는 법’(이 책의 원제)이라는 제목보다는 ‘창조적 악마, 이전에는 몰랐지만 당신이 원하는 작품을 완성하는 데 너무나 중요해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일부인 악마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더 정확할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웨이』 리처드 홀먼 지음, 알 머피 그림 (현대지성, 2024) p.203
내면의 감시자는 비단 창작자 뿐만 아니라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하다면 방해의 목소리가 좀 더 클 것이고 창작욕보다 불안이 더 크면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저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이 악마의 목소리에 휘둘려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이 책을 펴냈다.
책에서 다루지 않은 창조성의 마지막 악마는 후회의 악마다. 후회의 악마는 깐깐한 비판자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물귀신에 가깝다. 방해하는 악마에 압도당해 포기한다면 채워지지 않은 창조의 빈 자리엔 후회의 악마가 자리 잡는다. 얼마나 지독한지 다른 악마들은 구태여 제 역할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가장 두려운 악마를 품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시작해야만 하는 사람, 새로운 시도 앞에서 주춤하고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본문에서 언급한 도서 목록
존 스타인 벡 『분노의 포도』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안드레 애치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레너드 믈로디노프 『유연한 사고의 힘』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매슈 사이드 『다이버시티 파워』
모리스 샌닥 『괴물들이 사는 나라』
힐러리 맨틀 『울프 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나의 투쟁』
케이트 템페스 『온 커넥션』
추천하고픈 사람
오늘도 할 일을 미루고 이 리뷰를 보고만 사람
자기 의심과 자기 비판의 감옥에 갇힌 사람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져 폐기하기를 반복하는 사람
남들 크리틱은 기가 막히게 잘하지만 정작 자신은 슬럼프에 빠진 창작자
* 이 서평은 네이버 이북까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