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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고양이와 나
  • 메두사의 웃음
  • 엘렌 식수
  • 17,100원 (10%950)
  • 2026-02-05
  • : 9,986

나는 여성적 글쓰기에 관해 그것이 무엇을 할지에 관해 말할 

것이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써야/써져야 한다. 즉 여성은 

여성을 써야 하고, 여성들을 글쓰기로 오게 해야 하는데, 

그녀들은 자신의 몸에서 난폭하게 멀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법에 의해, 동일하게 치명적인 목적으로

글쓰기에서 멀어졌다. 여성은 자기 자신을 출산하고 역사를 

시작하듯이 자발적으로 텍스트에 착수해야 한다. (12-13)


엘렌 식수를 읽고 나면 늘 구멍이 많다. 이전에도 그랬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이전보다 낫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구멍이 있는대로 기록 남긴다. 독특한 판형이 원서에서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뒤에 보니, 프랑스어로도 절판되고 잊혀졌다가 영어권에서 인기 끌고, 다시 프랑스어로, 그리고, 이제 이렇게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언어를 건너면서 잘려나간 말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는 부분이 나온다. 지금 내 프랑스어 레벨로 원서로 읽는다고 더 잘 읽을리 없기도 하다. 내 친구 푸코, 내 친구 데리다 그러는데, 나는 푸코도 데리다도 읽은 적 없어서 벽을 느끼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나라는 독자를 만나서 더 조각날 수 밖에 없겠지만, 조각이라도 의미를 찾아본다. 70년대의 '여성적 글쓰기'보다 지금 더 나아진 부분도 분명 있고, 변하지 않는 부분들도 여전히 있어서. 그런 감각으로 읽었다. 

그러다보니, 글은 급진적이지만, 내용은 크게 급진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일견 보수적인 부분들도 느껴졌다. 


이론적 에세이와 시적 산문 사이의 글이라고 하는데, 내지 편집 디자인이 독특하다. 습관대로 왼쪽 페이지만 읽다가 다시 올라가서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며 읽다가 급기야는 글 뭉치를 읽어내게 하는 경험에서 얻게 되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 이상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게 둬서는 안 된다. 

과거의 효력이 여전히 있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그 효력을 공고히 하는 것, 거기에 운명에 

준하는 종신성을 부여하는 것, 생물학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을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앞지르기가 시급하다. 


그대는 왜 글을 쓰지 않는가? 글을 쓰라! 글쓰기는 그대를 위한 

것이고, 그대는 그대를 위한 것이며, 그대의 몸은 그대의 

것이니, 그것을 취하라. 나는 그대가 왜 글을 쓰지 않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왜 스물일곱 이전에 글을 쓰지 않았는지 안다.)

그건 글쓰기가 그대에게는 너무 높고, 너무 위대한 것이기에, 

'위인들', 다시 말해 '남성 위인들'에게만 할애된 것이기 때문이다. (18-19)



지난 몇 천년간의 과거의 효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벗어나기 위해 애쓰더라도 벗어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생물이 멸종을 향해 달려가듯, 그와 같은 효력도, 막상 벗어나려고 하면,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맞춰지면, 쉽게 떨어져나갈지도 모른다. 정말로 과거는 과거에 두고, 미래를 보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과거는 아주 찐득하고, 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자들과 거기에 실려 가려는 소수자와 약자들로 힘이 아주 쎄고, 끈질기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이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일지라도 '글쓰기'라는 무기를 들어서. 여자의 몸으로 여자의 글쓰기를 하는 것. 



좁은 인형의 방에서 그녀들은 빙빙 맴돌며 방황했고, 바보가 

되는 치명적인 교육을 받았다. 실제로 감금하고, 지연하며, 

아파르트헤이트 짓에 심히 오랫동안 성공할 수 있긴 하지만, 

그건 단지 한동안일 뿐이다. 그녀들이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이름을 말하는 그 순간부터, 그네들의 대륙은 검다고, 너는 

아프리카이니까, 너는 검다고 가르칠 수 있다. 네 대륙은 거매. 

검은 것은 위험하단다. 검은 것 안에서 너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겁을 먹잖아. 넘어질지 모르니 움직이지 마. 특히 숲에는 가면 

안 돼. 그리고 그 검은 것에 대한 공포, 우리는 그것을 내면화했다. (24-25)


에세이나 시적 산문이라기 보다는 선언문 같고, 선언문 같다고 이미 얘기하기도 했지. 



지금은 옛 여자에게서 새로운 여자를 해방할 때이니, 그러려면 

새로운 여자를 알고, 그녀가 곤경에서 빠져나와 지체 없이 

옛 여자를 초월함을 사랑해야 하고, 조화롭게 파동을 모으고

쪼개면서 단숨에 시위를 떠나는 화살처럼, 그녀 자신 이상이 

되기 위해 새로운 여자가 될 것을 마중 나가야 한다. (26-29)


내 안의 옛 여자, 과거를 사는 옛 여자를 해방시키는 방법은 새로운 여자를 아는 것, 새로운 여자를 사랑하고, 새로운 여자를 마중 나가는 것. 


또한 글쓰기는 여성에 의한 말의 장악을 기입하는 행위로, 

언제나 여성 억압 위에 형성된 역사 속에 여성의 요란스러운

입장을 기입하는 행위이다. 반로고스적 무기가

단련되게끔 글을 쓰기. 모든 상징 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소송에서 마침내 그녀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관계자이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서. 


지금은 문어와 구어 안에 여성이 일격을 가할 때이다. (38-39)


몸을 던지는 것. 글쓰기와 말하기로 몸을 던지는 것. 



집회에서 한 여성이 말하는 것을 (만약 그녀가 허망하게

호흡을 잃지 않았다면) 들어 보라. 그녀는 '말하는'게 아니라, 

허공에 자신의 떨리는 몸을 내던지고, 스스로를 놓아 버리고, 

비상하고, 목소리 속에 자기를 송두리째 실어 보내고, 자기 

몸으로 생생하게 그녀의 담화 '논리'를 지탱한다. 그녀의 육신이

진실을 말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녀는 실제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육체적으로 구현하고, 자기 몸으로 그것을 

의미화한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기입하는데, 

왜냐하면 충동의 통제할 수 없는 부분과 말에 대한 열정을 

거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담화는 '이론적'이거나 정치적일

때조차 단순하거나 단선적이지 않고 일반화된 '객관성'을 띠지 

않는다. 그녀는 역사 속에 자기 이야기를 끌고 간다. (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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