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리틀 블랙 클래식을 한 권씩 생각날때마다 읽고 있다. 이 시리즈의 좋고 힘겨운 점은 고전 모음이라는건데,
보통 많이 읽는 근대 고전 정도가 아닌, 중세, 고대의 고전이라는 것이다. 03. The Saga of Gunnlaug Serpent-tongue 는 아이슬란드 사가(이야기)로 13세기 후반 아이슬란드에서 쓰여졌고, 10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노르딕, 아이슬란드 이야기는 접하기 쉽지 않고 낯설다. 일단 이름과 장소의 고유명사를 소리 내어 읽기도 힘들다. 50페이지 정도의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래도 초반을 넘기고 나면 잘 읽힌다.
낯익은 이야기이고, 낯익은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서구 문학의 원류인 고대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지금 읽는 이야기들의 상류를 찾아가서 그리 다르지 않지만, 완전히 같지도 않은 장소를 탐험하고, 지금의 문학들과 연결지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주인공운 군라우그(Gunnlaug) 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의 닉네임인 Serpent-tongue 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아이슬란드에서는 시(poet, 아이슬란드의 영웅시 drapa) 가 칼과 같은 무기처럼 쓰였다. 이런 이야기들이 굉장히 흥미롭다. 전사들은 칼로도 대결하지만, 시로도 대결한다. Serpent-tongue은 뱀의 혀라는 뜻인데, 처음 봤을 때는 부정적 의미만 떠올랐다. Christinity, 교회 문화나 모던 판타지에서 뱀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랬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깨달았다. 북유럽에서는 조금 더 복잡한 의미로 쓰인다. 아니, 북유럽 뿐만 아니라 인도, 동남아에서도 뱀의 신이 현명함을 뜻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말을 잘하는데, 이건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말이 무기로 쓰이던 시대이니깐.
군라우그는 헬가라는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고, 청혼하지만, 외국으로 나가서 경험을 쌓고 싶어 한다. 3년의 기한을 두고 결혼을 약속하고 노르웨이, 스웨덴, 영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왕들을 만나 시를 바치고, 선물을 받고, 왕들을 위한 전투에 참여하느라 약속된 기한을 지키지 못한다.
명예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시기여서 결혼하겠다고 자신을 잡는 왕과 귀족을 떨치고 나오지 못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하르판(Hrafn) 이 헬가와 결혼하게 된다. 돌아온 군라우그는 하르판과 결투를 하게 되고, 이 결투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온다.
마지막에 헬가가 군라우그에게 선물 받은 망토를 꺼내 바라보며 슬픔을 삼키는 장면에서 이 이야기의 시작인 소스타인(Thorstein, 헬가의 아버지) 의 꿈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군라우그와 하르판의 사랑보다는 명예를 건 다툼으로 인한 비극, 그리고, 헬가의 마음과는 상관 없이 아버지와 남자들에 의해 화병처럼 오가는 헬가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