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문학권 작가들 책을 읽을 땐 꼭 작가 소개를 먼저 확인한다. 어디 어디 대학을 나왔다는 평이한 한국 작가 소개와 달리 작가가 이룩해 온 생애,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영향, 배경 등을 소개해주기 때문이다. 작가들이라고 소재를 하늘에서 건져오겠나. 삶에서 주어진 경험과 관록이 글자가 되고 문장이 되는 거다. 제프 린지의 소개도 이런 의미에선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에드거 상 대상 후보에 올랐지만 다른 필명으로 출간한 흔적이 발견돼서 제외된다거나, 헤밍웨이의 조카이자 자신의 아내인 힐러리와 공동 집필로 작가 활동을 쌓아올라 왔든가 하는 얘기들 말이다. 혜성처럼 떨어진 작가가 아닌,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들이 참 좋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살인마의 욕구를 가진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주로 쓴 작가라는 설명에 이 소설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갔다. <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죽음을>의 주인공은 안 봐도 쓰레기 같은 놈이겠거니!
『기사를 읽은 나는 확신했다. 아무도 절대로,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꼭 해내야만 했다.
나는 기사 속 사진을 유심히 살펴봤다. 사진 속에 있는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순간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것.
그래서 실제로 보아야 했다. 그리고 훔쳐야 했다.』 - p.25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스릴을 즐기는 살인마 혹은 도둑인 라일리 울프는 제프 린지가 그려내기 최적화된 캐릭터다. 정의랑 거리가 멀고, 잔머리는 쩔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뭐든 잘 할 수 있는 남자니까. 뭐든에는 당연히 ... 살인도 포함된다.
<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죽음을>은 사회적 범죄를 일삼는 부도덕한 상류층 인간들의 재산을 빼앗는 게 직업인 라일리 울프의 새로운 계획, 이란의 황실 보물인 '빛의 바다'(다리야에 누르)를 탈취하는 사건을 주축으로 벌어지는 스펙터클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라일리 스스로가 다이아몬드를 훔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에 그를 쫓는 또 다른 남자, FBI 요원 프랭크 델가도를 통해 밝혀지는 라일리 울프의 과거까지. 따라갈 것은 많고 궁금한 것도 많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라일리가 어떻게 다이아몬드를 훔칠 건지가 관건 아니겠나.
라일리 울프의 도적 스타일은 어떤 천재적인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그 안에 파고들어 사람을 조종하는 심리전에 능한 남자다. 사람의 심리를 농락하는 것 자체가 캐릭터가 가진 능력을 온전히 보여준다. 천재적인 손 기술력, 파고들어 캐내는 빅데이터보다 더 끌린다. 하지만 그만큼 이런 도둑 스타일의 결말엔 좀 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부도덕한 상류층 인간들의 망연자실한 심리까지 표현해줘야 의적 느낌이 물씬 나지 않겠나.
하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 라일리 울프는 탈락이다.
라일리 울프는 '너무 쉽게' 남의 마음을 얻고 그를 이용하면서 '너무 쉽게' 농락해버린다. 이 작품에선 그런 캐릭터가 꽤 많이 나온다. 박물관의 경호를 담당하러 온 주제에 이 기간에만 즐기려는 생각으로 여자를 꼬시는 팀장 블레이드쇼도 라일리 스타일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에선 프로일지 몰라도 개인적으론 정말 아웃인 '폭탄'이다. 폭탄 놈들끼리 싸우다 죽는 건 하나도 아쉽지가 않은데, 이 과정에서 쓰임을 다하면 버려지는 여자 캐릭터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니크가 마침내 눈길을 돌리며 조용해졌다.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훈계를 들을 때보다 훨씬 나았다.
"난 당신이 정말 좋아요, 라일리." 잠시 후 모니크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을 존경해요, 많이.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라요."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이용하다니. 그래놓고선 그냥 떠나버리다니……"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야. 도저히..... 나는 이해할 수가......"
모니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끝까지 말을 하진 못했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모니크."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모니크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p. 452-453.
도둑놈들이 잘 사는 세상, 그리 반가운 건 아니다. 권선징악 소설을 기반으로 살아온 K 시민으로서 도둑놈들이 주인공인 소설에선 어느 정도 주인공이라도 굴러야 마땅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하지만 도둑놈들의 세상도 마냥 기꺼워하기엔 그 불순한 인간의 삶이 매력적이다. 나름의 기준을 갖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천재적인 도둑의 행적은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스릴이 있다. 라일리 울프에겐 분명 충분한 매력이 있다. 한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 책, 시리즈였다.
라일리 울프가 맘껏 훔치고, 맘껏 즐기며 시리즈를 진행하길 바란다. 모든 걸 가진 라일리 울프가 마지막엔 급행 감옥 열차에 종신형으로 올라타길 기원하며.
(위의 리뷰는 북로드의 서평 이벤트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