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운하시곡』에 홀린 건 단편선 첫 번째 소설 작가인 하지은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학 친구의 추천으로 본 '얼음나무 숲'을 시작으로 '모래선혈'에서 입덕한 작가였다. '눈사자와 여름' 이후 신작이 없어서 궁금했던 차에 단편집 리스트에 그녀가 있길래 눈이 번쩍 했다. 아, 물론 그녀만의 독자답게 이미 이 책의 제목으로 뽑힌 작품 『야운하시곡』은 출간 되기 전에 접했었다. 무협따위 돈을 주면서 보라고 해도 안 보는 나에게 새로운 장르를 열게 해줬달까. 장르에 한계없이 늘 좋은 필력을 보여주는 하지은의 믿보 작품으로 등극한 『야운하시곡』, 소개하려니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두근하다. 근데 『눈사자와 여름』은 아니었어 지은씨..차기작은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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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서번연)
『야운하시곡』은 냉혹한 무림의 패자, 사혈공의 생애를 그린 이야기이다. 원했던 아이도 아니고, 원하던 여인도 아닌 여인과 함께 낳은 아이는 병으로 일곱살의 짧은 생을 마친다. 아이와 함께 했던 7년, 그리고 아이를 묻고 난 이후 만난 새끼 늑대, 그리고 그가 이 생의 원과 업을 정리하는 현재가 혼잡하게 뒤섞여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거와 현실을 드나들며 전개되는 이야기인만큼,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기에 어쩌면 사혈공이 하는 모든 일들이 그저 안타깝고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일리가 없잖아!
작중 사혈공의 아들 '휴'는 선천적 기혈과 관련하여 병을 앓고 있다. 사혈공은 어느 날 휴를 통해 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지사자'란 의원을 알게 된다. 지사자는 그저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병을 고쳐주고 대가를 받지 않고 명의였다. 사혈공은 당장 그를 찾아가지만 지사자는 아이를 고쳐준다는 말 대신 낯선 이의 이름을 말하며 그 이를 아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기억할 리 없는 이름. 사혈공의 검이 보낸 무수한 피 중 하나였을 뿐. 그러나 그 이름은 지사자의 유일한 혈육인 아우의 것이었다. 지사자는 협박과 애원을 동원하며 아이를 살려달라 빈다.
"무고한 아이의 생명을 가지고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저를 죽이시고 제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복수를 하실 것이라면 아이가 아니라 저에게 하십시오."
그는 무릎 꿇은 나를 보고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끄어어어어 우리 휴 살려내애애애애애 이게 뭐야야야 의원놈아 니 동생 이름 나도 모르겠고 일단 휴를 살려내라고오오오오... 를 읽는 내내 외쳤다. 사혈공이 젊어서 사람 죽이고 다닌 거 내가 알 게 뭐람. 똘망똘망하게 고마워요 아버지 고마워요를 말하는 일곱살 난 소년 살려서 고마워요 의원님 고마워요 소리 들으며 용서해주면 안되겠니..? 그러나 사랑이 돌아오듯 업보도 돌아오는 것. 지사자는 끝끝내 휴를 고치기를 거부한다. 결국 끔찍한 병마와 싸우던 아이는 사혈공에게 자신을 죽여달라 빈다. 차라리 고통 없이 일찍 끝내고 싶다고. 사혈공은 다시 만나자는 약속 하나를 주고받고 아이를 손수 명계로 보내준다. 아이를 묻고 나서야 그를 용서하고 아이를 치료하러 온 지사자 한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속도다 인마 도, 사혈공도 모두 허무하다. 죄는 사라지지 않고, 생은 계속된다.
『야운하시곡』이 주는 업보와 생의 굴레의 허무함이 너무 오래 가서 사실 뒤의 6작품 먼저 읽고 이 작품을 읽었다. 읽은 지는 꽤 되서 분명 내용 자체는 가물가물한데 은근히 읽기 가슴 아팠다는 감정만 오래도록 남은 듯 하다. 다시 읽어도 찌통인 작품. 그러나 안 읽고는 못 배기는 그런 작품이 『야운하시곡』이다.
『야운하시곡』 단편선은 7개의 작품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편이다 보니 훌훌 넘어가는 재미가 있다. 엄청 커다란 사건도 없지만 딱히 죽을만큼 목 멕히게 하는 고구마도 없다. 짧지만 소재에 온전히 집중하여 압축된 이야기들이 굉장히 흡입력이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일단 작가들 중에 필력이 내 취향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동양 소재로는 아무래도 정보나 역사 뿐만 아니라 대화체까지도 제한된 부분이 많았을텐데 7작품 모두 퀄이 어마어마했다. 단편 드라마로 나와도 7개 다 본방사수할 느낌이다.
개인적 팬심과 가장 높았던 퀄의 『야운하시곡』을 제외하고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다시 쓰는 장한가』였다. '장한가'는 백거이의 작품으로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명인 양귀비와 현종의 비련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 서사시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비련의 사랑 같은 소리 하는 걸 보니 백거이 그렇게 안 봤는데 어지간히 아부쟁이였나보다.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미쳤다고 좋아하냐. 연하의 다시 없을 미남도 아닌데 양귀비가 미쳤냐고. 권력도 사랑의 이유가 된다면 인정. 그런데 꽤 많은 중국의 작품들도 양귀비의 주체에 대해서 강제였지만 후에 쌍방이 된다는 뉘앙스로 로맨스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대..대단하다 이놈들! 이왕 그렇게 그려낼거면 좀 설득력 있게 그려내면 안 되나? 현종이 매번 강제로 하고 양귀비는 일단 억지로 따르고 그 이후 서사 쌓는 거 지루하지도 않냐. 불륜 드라마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내는 K국에선 어림도 없는 전개다. 그런 시류에 꽤 실망스러웠는데 국내에서 양귀비를 소재로 『다시 쓰는 장한가』 같은 양귀비의 마음을 꽤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 나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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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서번연)
『다시 쓰는 장한가』는 미색을 지닌 요부로만 평가 받아 온 양귀비와 현종의 이야기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소설이다.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는 사람이 양귀비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이끄는 주체 화자는 양귀비가 아니라 제 3자이다. 타인의 입과 시선을 빌려 양귀비를 새롭게 묘사하면서 그로 인한 보는 인물의 심리의 변화까지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의외로 굉장히 중국스러운 배경을 잘 풀어내더라. 내노라하는 중국 언정 소설 몇 권을 다 봤지만, 이만하게 심리 묘사를 잘하는 작가는 정말 드물다. 김이삭씨 다음 작품이 참 궁금한 걸....? 중국 문화 덕질하다 여기까지 왔으면 더 덕질해서 끝을 보자. 우리 이삭씨 화이팅.
정말로 양귀비가 현종을 사랑할 수도 있겠지. 그런 가능성을 일말의 재고없이 떨구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사랑은 정말 다양하고 여러가지 색깔을 띄고 있기 때문에, 내 관점이 이해못할 사랑이라 할지라도 진실되었다면 그것 역시 사랑이리라. 그런데 수많은 작품들이 양귀비의 가련함과 비참한 인생을 재조명할 때에도 그녀가 정말로 현종을 사랑했는지, 사랑하지 않았는지, 사랑했다면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무슨 마음으로 대했는지 등등 그녀가 품었을 위험하고도 야릇한 사고 혹은 처절하고 괴로운 그녀만의 시각을 제대로 표현하기를 주저해왔다. 왜? 시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라서? 사랑따윈 한 점도 없이 강제로 당한 여자는 생각따위는 없어서인가? 아니면 너무 가서 현종 재조명할게 두렵냐 충분히 인간이 가질 만한 모든 원인을 배제하고 왜 '결과'에만 치중하며 온전히 인물을 그려내지 못하는 걸까. 『다시 쓰는 장한가』는 이런 점에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애정을 하든 증오를 하든 감정에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공감대가 없는 무수한 작품 중에 이런 보석같은 작품을 만나 그저 반갑다. 물론 굉장히 양귀비에만 치우쳐준 시각이다. 백성들이 보면 현종이나 양귀비나 그저 폭탄...백성 관점 나오면 고어물, 복수물, 혁명물 되는 거야 그냥...
브릿G에서 수작의 작품을 출간해서 오랜만에 진짜 재미있게 동양 소설을 읽었다. 유명 소설 플랫폼에 가면 제목부터 머리 싸쥐고 싶은 것들 투성이라서 꽤 오랫동안 새 작품 파기를 주저했는데 브릿G가 다시금 벨테기를 극복하게 해줬다. 근데 문제는 이만한 작품을 찾기가 또 어렵다는 거.. 브릿G의 앞으로 행보를 기대해본다.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