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바로 사람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거죠, 친구.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추한 것. 하지만 나머지 둘 때문에 처음 게 위축되게
만들지는 말아요.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건 처음 거니까요.
그걸 계속 지켜내면, 친구, 당신은 모든 걸 제압할 수 있어요.
그게 불변의 진리죠.」-p.210
발다치가 제대로 물 올랐다. 지난 시리즈 <폴른 : 저주받은 자들의 도시>의 도시 배런빌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너무 재미있어서 5편인 이번 작품이 재미가 떨어져도 이해해 주려고 했다. 4편의 재미는 신호탄이었나. 발다치가 그려내는 에피가 나날이 꿀잼이다. 혼란스러운 미국의 요즘 세태를 데이비드만치 흥미롭게 엮어주는 드라마틱한 작가가 또 있나. 있다면 제발 추천 좀 해달라. 데이비드 보고 다른 영미문학 보려니까 손이 안 간다!
<진실에 갇힌 남자> 안의 미국은 전작의 도시 배런빌 때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미국 곳곳에는 한 때 호황을 누렸으나 결국 쇠락기를 걷게 된 러스트벨트 타운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주인공인 데커의 고향 벌링턴도 그런 도시들의 대열에 낀 지 오래다. 높은 실업률로 인해 실업자는 넘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약에 절어 파탄난 인생들이 겨울철 기둥에 묶인 채 말라가는 굴비같이 살아가고 있다. 나는 마약을 단순 쾌락에 이용하는 걸로 알고 살 때가 있었다. 이 시절엔 미국 사회의 만연한 마약 실태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미국의 다른 이면(의료보험 실태)을 알고 난 이후엔 마약에 미친 미국 사회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고통에 가성비를 따지고 있는 세상이 궁금하다면 고개를 들어 미국이란 나라를 보라.
희망을 잃어버린 도시에 데커가 매년 찾아오는 이유는 그의 가족 때문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가족의 죽음. 그들을 방문하러 14년 내내 찾아 온 데커는 여전히 그 날의 트라우마에 갇혀 산다. 데커는 고통을 잊을 수 없는 몸이지만, 역설적으로 과잉기억증후군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가족의 죽음을 쉽게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에는 기여하지 못하지만, 형사로서는 큰 원동력이 되고 있을 뿐. 그가 나쁜 놈들을 재판장에 세우고, 교도소로 보내는 작업들은 그에게 있어 치유나 회복의 행위가 아니다. 가족의 삶을 대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생명 유지'의 일상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찾아온다. 무려 그가 처음 강력반 형사가 되어 담당했던 사건의 범인이 그를 찾아왔다. 말기암 판정을 받아 교도소를 나올 수 있었다는 일흔의 남자, 메릴 호킨스.
「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호킨스가 손가락으로 데커를 가리켰다.
"당신은 날 감옥에 넣었어. 하지만 당신이 틀렸어. 난 무죄야." 」-p. 14
13년 전, 4명을 살인한 죄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은 남자가 임종을 앞두고 찾아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사건이 시작된다. 그 남자를 교도소로 보낸 데커에게 일부러 찾아와 무죄를 입증해달라는 호킨스의 행위가 예사롭지 않다. 데커는 100퍼센트 그 때의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한 추리에서 기이한 점을 발견하면서 이후 호킨스를 다시 대면하려 하지만 그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상태로 발견된다. 누군가 호킨스의 사건을 파헤치길 원하지 않는다. 데커의 감이 울리고 있었다.
형사가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누군가를 억울하게 교도소에 보냈다면 이건 엄청나게 큰일이어야 마땅한데, 주인공이라 그런가 뉘우침이 생각보다 짧다... 이제라도 와서 다시 바로잡으면 된다는 미국식 사고방식이 좀 무섭긴 하더라. 물론 극중 내내 그런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사건을 팽개쳤다면 그건 그거대로 전개상 너무 답답했겠지마는. 원체 데커란 캐릭터가 인간성이나 인간관계에 무지한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그런 역설적인 묘사와는 또 다르게 데커는 인간적인 면모를 작중에서 끊임없이 드러낸다. <진실에 갇힌 남자>에선 특히나 데커의 인간미가 돋보인 타이밍이 많았다. 어느새 타인의 인간관계에 그럴싸한 조언을 해주는 데커라니. 그도 성장형 인물이었다.
데커가 점점 인간적으로 변할수록, 작품 속 사건은 더 잔인하고 거침없어지고 있다. 상실에 익숙한 이 시대에 데커의 인간성 회복은 분명 주목할 만한 매력 요소다. 방조, 누명, 살인 등과 같은 잔혹한 사건 앞에서도 오직 진실만 추구하는 형사는 얼마나 특별한가. 게다가 주변 인물들도 매력 포인트가 꾸준히 증가 중이다. 나의 전작 최애는 배런 씨였는데, 이번 작품에선 매력 캐릭터가 한 명만 꼽기 어려울 정도로 넘친다. 재수탱이 블레이크 네티, 데커의 옛 동료 메리 랭커스터, 2편의 주인공으로 이제 부자 생활 좀 즐겨야 하는데 자꾸 나와서 목숨이 위태로운 멜빈 마스까지. 이 시리즈에서 유일하게 2편을 못 읽었는데 이번 달이 가기 전에 2편의 멜빈 마스를 영접하려 한다.
발다치의 다음 시리즈는 또 언제 나오려나. 그가 그려내는 새로운 데커의 사건이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