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어가 가둔 세계: 대상화된 고통과 시들어버린 꽃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틀이다. 프롬은 현대인들이 "머리가 아프다(I ache)"라는 동사적 상태 대신, "나는 두통을 가지고 있다(I have a headache)"라는 명사적 소유를 선호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단순한 화법의 차이가 아니다. 고통이라는 실존적 체험마저 내 것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현대인의 강박을 보여주는 현상학적 징후다. 흐르는 시간을 멈춰 세워 박제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살아있는 생명력을 앗아간다. 저자가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세상을 대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서양의 테니슨은 아름다운 꽃을 보자마자 뿌리째 뽑아(Pluck) 손에 쥐고 탐구하려 했다. 반면 동양의 바쇼는 꽃을 그저 바라보며(Look carefully) 그 존재 자체와 공명했다. 물리학적으로 관찰 행위가 대상을 변화시키듯, 소유하려는 욕망은 대상의 생명을 파괴한다. 꽃을 꺾어 든 순간 남는 것은 시들어가는 식물체뿐, 꽃의 아름다움(본질)은 사라진다. 우리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은 죽은 껍데기뿐이다.
2. 데카르트의 변질: '나는 생각한다'에서 '나는 소유한다'로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하며 인간 이성의 주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이 명제는 비극적으로 변질되었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의 존재 가치가 내가 가진 물질, 지위, 그리고 지식의 양으로 증명되는 물신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소외(Alienation) 현상은 배움의 영역에서 가장 뼈아프게 드러난다. 진정한 앎이란 사고의 근육을 움직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학교는 지식을 마치 상품처럼 진열하고, 학생들은 그것을 최대한 많이 쇼핑하여 머릿속 창고에 쌓아두는 것을 공부라 여긴다. 이해와 성찰이 거세된 채 암기된 지식은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생각하는 힘을 잃은 지식은 그저 소유물일 뿐,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저자의 통찰은 교육 현장에 있는 나에게 서늘한 죽비소리처럼 다가온다.
3. 50년의 시차, 변하지 않는 인간의 굴레 책의 말미, 프롬은 당대 사람들의 의식을 조사하며 '새로운 인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놀랍고도 씁쓸한 것은, 이 책이 쓰인 1976년과 2026년을 바라보는 지금의 사회 풍경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우리는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쥐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도구에 종속되어 더 깊은 불안과 고립감을 느낀다. 물질적 풍요가 내면의 빈곤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다. 50년 전 프롬이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더 절박하다. 우리는 소유의 욕망이 만든 무한 경쟁의 궤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은 무언가를 채워 넣는 '축적의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깨어있는 정신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존재의 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멈춰 서서 질문해야 한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인가, 아니면 나는 나 자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