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감각으로: 클랑 쿤스트(Klangkunst)
/슈테판 프리케•오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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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
하루는 슈테판 프리케(Stefan Fricke)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클랑쿤스트(Klangkunst)는 무엇이고 사운드 아트(Sound Art)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그 어떠한 용어보다도 ‘예술‘이 더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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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대체로 소리와 예술을 접목한 장르를 ‘사운드 아트‘라고 부르며, 그 종류 또한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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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건 한국에서 사용하는 이 개념 ‘사운드 아트‘는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자 자연스럽게 한국에 정착될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운드 아트의 본거지 중 하나이자 활발한 씬을 가진 독일에서 본 클랑쿤스트의 기준은 나에게 좀 까다롭게만 느껴졌고, 그렇기에 이 용어와 장르의 본질부터 다시 파악하고 싶었다. 이는 분명, ‘사운드 아트‘와는 다른 성질을 띄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온 질문 중 하나, 클랑쿤스트(Klangkunst)는 도대체 무엇인가.
P. 53
클랑쿤스트(Klangkunst)는 음향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부분도 포함됩니다. 클랑쿤스트에 대한 정의은 굉장히 다양한데요. 특히 1970년대와 오늘날의 정의는 큰 차이를 갖습니다. 저에게 클랑쿤스트란 일반적으로 분리되어 있거나 역사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들을 통합하는 것입니다.
P. 96
˝Dreaming of a Major Third˝(장3도를 꿈꾸며)는 두 종들이 결코 완전한 제 3도의 음정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P. 136
우리는 이 작품이 실제로 어디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악보일까요, 연주일까요, 아니면 두 가지 혼합된 것일까요? 음악학에서는 작품의 귀속을 작곡가, 즉 악보에 명확히 돌립니다. 그러나 악보는 소리 결과물에 대해 어느 정도로만 설계된 가능성의 공간을 나타낼 뿐이죠. 악보는 여전히 열려 있고, 모호하먀, 비구체적입니다. 그리고 해석자가 요구되죠. 그저 읽기만 하는 경우에도 말이죠. 반면에 사운드 아트는 항상 구체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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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랑쿤스트의 정의를 탐구하는 내용을 읽으며, 악보로 연주되는 음악이 ‘모호하다’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보는 소리의 결과물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의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연주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음악은 열린 구조를 가진다. 반면, 사운드 아트는 항상 구체적이며, 그 자체로 완결된 형태를 띤다고 한다.
그렇다면 음악(소리 예술)이 포함된 클랑쿤스트는 단순한 음악의 개념을 넘어, 보다 확장된 예술의 한 형태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클랑쿤스트는 단순히 소리를 활용한 예술이 아니라, 시각적 요소까지 결합된 총체적 예술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음악보다는 현대 예술에 가까운 학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물며, 우리가 소리를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새롭게 질문한다. 음악을 잘 몰라도(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더욱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소리에 대한 색다른 시각과 예술적 탐구를 경험해 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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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