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전에 사전에서 <사회학>의 정의를 찾아 보았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라는 책 제목을 보고 난 뒤, 실은 <사회학>이라는 용어에 방점이 찍혔다. 어렴풋이 알 듯하지만 정확한 정의가 뭔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추천사에 철학지 지바 마사야는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기묘한 '바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대단한 모험은 아니다. 기묘하게 단편적인 장면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사회. 한순간 반짝이는 이질감.'
이 추천사로 책에 대한 호기심이 더 높아진 게 사실인데, 아마도 사회학 이라는 용어가 가진 '여러가지 사회 현상의 통일적인 관계'에 썩 어울리는 추천사가 아니었나 싶다. '기묘한 바깥'이라는 말이 이 책과 가장 어울린다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생각한다.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1967년 생으로 사회학자이다. 오사카 번화가를 자주 어슬렁거리며 재즈와 동네 책을 좋아한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면서 <동화와 타자화>,<거리의 인생> 등의 책을 썼다. 저자는 '사회학자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한 사람씩 찾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의 생화사를 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러니까 이 책 역시 저자가 만난 사람들, 길거리의 이야기이다. '콕 집어 내세울 만한 주제나 내용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글자 그대로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주욱 늘어놓고, 그것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해 생각한 책입니다.'라고도 적었다.
이 책의 제목이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라는 것, 그게 책 속의 글들과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개개인의 삶이란, 어떤 큰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어찌 보면 자잘한 에피소드들의 묶음 일 테니까. 저자 역시 그 부분을 집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일본인 저자이다 보니, 책 속에 담긴 에피소드들이 간혹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아 낯설기도 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일본이든 한국이든 한 사회 안에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다르지 않으니 읽으면서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저자의 어슬렁거리기는 실제로 길거리를 넘어서 인터넷 속의 블로그까지 이어진다. 내가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들을 블로그에 적고, 그것을 누군가 읽고 생각하고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 만들어 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괜스레 짜릿해진다. 젊은 사람, 연륜이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 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거창하게 사회학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좋을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밑줄 그으며 읽은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이 책이 내게 알려 준 게 많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론 삶의 지혜를 다른 누군가의 글을 통해 배우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다른 누군가에게 다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밑줄 그은 부분을 많지만 다 옮겨 본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어 보고 싶어질 것이고, 누군가는 밑줄 그은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르니까.
- 어떤 사람이든 다양한 `서사`를 내면에 담고 있다. 그 평범한, 보통다움, `아무것도 아님`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쥐어뜯기는 것 같다. 우메다 번화가에서 옷깃이 스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보통의` 이야기를 붙안고 살아가고 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인생의 이야기가 구술 채록의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조차 뜻하지 않게 이야기가 늘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이런 이야기가 딱히 숨어 있는 것은 아니지 싶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눈앞에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것과 접촉할 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p29
-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란 본래 `우리`에게조차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잃어버리지도 않고 단절당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고,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무언가일 뿐이다. p34
-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중략)
소수자(minority)라고 불리는 사람들, `당사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들 소수자나 이른바 `보통시민`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기가 있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일이나 가족이나 인간관계 등으로 골치가 지끈지끈 아플 때만, 잡다한 일에 마음이 얽매여 눈코 뜰 새 없을 때만, 우리는 있을 곳의 문제를 잊고 지낼 수 있다. 우리에게 있을 곳이란 없든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그 문제를 잊고 있을 뿐이든지, 둘 중 하나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누구와 있어도, 있을 곳이 없다. 비록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있어도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깥세상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p80-81
-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무언가로 상처를 입었을 때, 무언가에 상처를 입혔을 때, 사람은 우선 입을 다문다. 꾹 참으면서 견딘다. 또는 반사적으로 화를 낸다. 소리를 지르거나 말대꾸를 하거나 노려보기도 한다. 때로는 손찌검을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한편 웃을 수도 있다.
마음이 아플 때의 반사적인 웃음도, 당사자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는 자학적인 웃음도, 나는 둘 다 인간의 자유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실현 같은, 말만 그럴듯한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렇게 거대하고 용장한 서사 속에 없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가장 괴로울 때 웃을 자유가 있다. 가장 힘든 상황 한복판에서조차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사람이 자유다. 이 말은 선택지가 충분히 있다든가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버티고 있는 꽉 막힌 현실의 끝자락에서, 딱 한 가지뿐인 무언가에 남겨져 그곳에 존재한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p97-98
-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이를테면 행복을 믿은 탓에 행복에서 길을 벗어나 버렸을 때는 이미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 경우가 있다. p108
- 돌이켜 보면 정말 한심하고 별 볼일 없는 문제로 끙끙댔구나 싶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때때로 상상해 본다. 잘생기고, 행복하고, 아무것도 부족할 것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신을..., 남에게 칭찬받고, 평안하고,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인생을... 가족과 더불어 행복한 인생을...
지금 현실적으로 그러하듯, 매일 무사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은 부족한 것 투성이, 아귀가 잘 맞지 않는 것 투성이다. 그것은 껄끔껄끔하고,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어릴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다. p115-116
- 아픔을 견디고 있을 때, 사람은 고독하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우리가 느끼는 격렬한 통증을 뇌에서 꺼내서 건네줄 수는 없다. 우리의 뇌 속으로 찾아와 느끼고 있는 아픔을 함께 느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다른 누군가와 살을 맞대고 섹스를 하고 있을 때에도 상태의 쾌감을 느낄 수는 없다. 부둥켜안고 있을 때조차 우리는 그저 각자의 감각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p138-139
-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꾸는 꿈이다. p170
- 우리는 신이 아니다. 우리가 양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올바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본 올바름이다. 이것이 타자에게도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속임수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이비 의학에 빠져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우리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도저히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라도, 그 상황은 그 사람에게 `진정한` 자기 자리일지도 모른다.
이러할 때 단편적이고 주관적인 올바름을 휘두르는 것은 폭력이다. p201
- 우리는 우리가 놓인 이 처지를 어떤 벌을 받았다거나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자신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어떤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무의미한 우연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타고나 자신으로 존재하다가 죽어 가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인생을 선택하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p214-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