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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그녀,
  • 우리의 여름에게
  • 최지은
  • 12,600원 (10%700)
  • 2024-06-07
  • : 5,853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은데 아직도 여름 같다.

덥다고, 어쩌면 추석이 다가왔는데도 이렇게 덥냐고, 에어컨을 켜며 중얼거렸다.

마치 변명하듯.

언제까지 여름일 거냐고, 이러다 가을은 못 만나고 겨울이겠다고 불평했던 지난 며칠이 최지은 시인의 <<우리의 여름에게>>라는 책을 읽으며 사라졌다.

아니, 조금만 더 이 여름이어도 좋겠다 싶었다.

반짝이는 어느 여름, 어느 시절, 어느 사랑, 어느 사람들.

여름이어서 아름다울 모든 것들에 조금 더 마음을 주고 싶어서. 거기에 '나'도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실은, 책 속의 글들은 꼭 여름이 아니었어도 좋았을 거다.

따뜻한 봄에 읽었으면 다정했을 거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에 읽었으면 위로받았을 거다.

몸이 꽁꽁 얼 만큼 추운 겨울에 읽었다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언 손을 녹여주고 싶었을 거다.

그러니까,

너무 좋아서 매 순간 기뻤을 거다.

나에게 무조건 적인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 나를 미워했거나 내가 미워했던 사람들, 상처 준 사람들, 볼수록 아프기만 한 사람들,

너무 사랑해서 나를 다 내어주어도 좋을 것 같은 사람들,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까지,

한 사람 한 사람 흐릿한 기억으로나마 떠올리면서 그들로 인해 지금 '나'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건 그저 사랑이었음을, 믿음이었음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시인의 글은,

온통 사랑이었고, 끝내 나는 그 사랑에 손들어버렸다.

아팠을 텐데, 힘들었을 텐데, 미웠을 텐데... 같은 마음은 둘 곳이 없었다.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죠. 지금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흰밥처럼 새하얗고 깨끗한 마음을 주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랑 같지만, 너무나 크고 깊은 사랑을 받았기에 어떻게든 이 사랑을 나눠주고 싶다는 말이에요. 자랑 같지만,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이고요. 갈수록 저는 더 알 것 같거든요. 제가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제가 지닌 사랑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할머니가 제게 먹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할머니는 제 마음을 다 아시겠지요. 그리고 당신도 꼭 제 마음처럼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쉽게 지치면 안 되는 여름이 다가옵니다. 또 다른 여름, 강건하게 마음을 지키기로 해요. 무슨 이야기인지 다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 <자랑 같지만> 중에서, p20



할머니는 손녀가 좋아하는 오이지를 먹이고 싶어서, 오이를 소금물에 절이면 더 아삭해진다기에, 새벽에 일어나 소금물을 끓이다 화상을 입는다.

어린 손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그해 여름을 할머니는 병원에서 보낸다. 더 이상 손녀에게 오이지는 찬물에 말아 시원하게 먹는 아삭한, 맛있는 반찬이 아니게 되었다. 어린 손녀는 몰랐지만 어른이 된 손녀는 안다. 그게 사랑이었음을.

시인의 글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어머니.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 시인의 이야기는 어린 시인을 밖으로 끌어낸다.

자꾸 내게도 그때의 너로 돌아가라고 한다. 아픔만은 아니었을 수도. 그때 무한한 사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만 툭툭, 털고 보내주라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멀리서 시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시인의 북토크 자리든, 어디든. 시인의 이야기를 시인의 목소리로. 아주 오랜만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기분.

고백 같은 거 할 순 없겠지만, 오래오래 시인의 시를, 에세이를 읽고 싶다.


어머니라는 세계의 부재로 인해 저는 이 모든 것을 손안에 쥐고 있습니다.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무궁한 모름의 세계까지 나의 손에 있습니다. (...) 이런 것을 적어 내려가는 오늘 밤은 하필 봄이 가깝고, 나의 고백은 두렵고, 나는 나의 문장을 미워하고, 나를 이해합니다.

누구나 오직 자신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몸으로, 나의 언어로, 나의 세계로, 나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그럴 때면 '없음'의 자리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없음에서 주어 올린 마음.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었던 마음. 없어서 구할 수 있었던 마음. 이런 건 무어라 이름 붙여주어야 할까요. 하필 나와 비슷한 돌멩이를 쥐고, 봄이 가까운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나를 닮은 사람을 떠올릴 때면 나는 더 솔직해지고 싶은 거예요. 더 용기 내고 싶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나의 단어를 찾아가면서요.

- <그럴 때 우리의 사랑은 조금 더 나아가고요> 중에서, p29




당신도 당신의 어린이를 이야기하기를, 그 아이에게 깊이 사랑받기를.
잘 되어가지 않을 때에도 나는 나의 사랑 이야기를 믿는다. 물동이에 다 담기지 않아도 하늘은 틀림없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물동이에 가둘 수 없는 깊은 하늘을 이제는 믿으니까. 내 사랑은 여기서부터 되어간다.
순전히 나의 사랑만으로. 나의 이야기는 되어간다, 더, 되어간다. - P45
슬픔을 슬픔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가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오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언가 때문에라도 슬픔은 슬픔으로 두고 싶다. 언제든 슬플 요량으로 이불 끝을 조금 끌어당겼다. 날이 밝으면 이 빛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나가 걷자고 생각하면서. - P63
할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은 죽음 후에도 나를 돌보러 온다. 어쩐지 쓸쓸해 창을 열며 마음을 달랠 때 구름이 있고 하늘은 맑고, 깨끗한 가을 공기가 들어온다. 두 사람은 이 모든 것이 되어 한꺼번에 내게 온다. 아버지의 거울을 꺼내어 하늘을 비추고 햇빛을 비추고 잠시 나를 비춰본다. 거울 속에는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어 있다. 나 역시 언젠가 구름이 되고 하늘이 될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도 숨어 있다. 거울 속에서 손톱이 예쁜 어린이가 나를 안아주러 단숨에 나타나기도 한다. 안녕, 내가 아는 나의 어린이. 이 어린이를 어떻게든 미워할 수가 없다. - P85
사소한 기쁨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체득한 삶의 방식이다.

바닥을 잃었던 여름밤과 다락, 정처 없이 쏘다녔던 거리를 잊고 싶지 않다. 그런 나날 속에서도 나를 위해 음식을 해 오고, 안부를 묻는 사람과 숨길 수 있는 다락이 있었다는 것이 내 삶에 주어진 알 수 없는 호혜였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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