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없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고백하자면 아주 많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큰일 났어. 엄마 좀 도와줘."라고 말하는 엄마가 없다면...
휴대전화에 엄마의 번호가 들 때, 반가움보다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엄마가 없다면...
지난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전화를 걸었다.
두 시간쯤 지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깜박 잠들었어. 이제 깼네."
"그랬구나."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모녀 사이에 승패를 가를 싸움 따위 애초에 상관없는 일이라는걸.
모녀 사이에 누가 있고 없고를 따질 의미가 이미 없다는 걸.
그러면 엄마랑 좀 멀리 떨어져 살지 그랬니? 내 인생에서 멀리 떠나버리지 그랬어. 내가 말릴 사람도 아니고.(p319)
<<사나운 애착>>을 읽으며 꾹꾹 참아왔던 감정이 이 문장 앞에서 무너졌다. 만약 나의 엄마가 내 앞에서 그렇게 말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어쩌면 나는 엄마가 끈질기게 나를 놓지 않고, 내게 무언가를 원하고, 필요로 해서 엄마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대체로 많은 엄마들이 생각한다. 자신을 희생해 자식을 키웠다고. 대체로 많은 딸들은 생각한다.
엄마의 희생은 딸인 내가 원한 건 아니라고. 고닉과 고닉의 엄마 역시 다르지 않다. 고닉의 엄마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고닉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고닉의 세계는 엄마 이외의 것들로 채워져 있고, 외부와 내부의 간극은 점점 벌어진다.
사랑이 모든 것이라 믿었던 고닉의 엄마는 부유하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부모와 자식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완벽에 가깝다고 느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남편(가장)의 죽음 이후 중심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남편(가장)을 잃은 슬픔과 자신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게 아니라 더 깊이 파고 들어간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읽히던 이야기가 어느 부분에서는 여자 대 여자의 이야기로 읽혔다.
고닉의 엄마는 일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나가려는 고닉에게 딸이 아닌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사는 여성의 모습을 본 것처럼.
너 정말 모르겠니?
엄마는 애원하듯 말한다.
엄마한테는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달리 뭘 가질 수 있었겠니? 네가 인생 얘기하는 거 다 옳지. 다 맞는 말이야.
너한테는 일이 있었잖아. 너만의 일이 있잖아. 너는 여행도 많이 했고. 세상에나, 여행이라니!
넌 지구 반 바퀴는 돌아봤지. 난 여행은 꿈도 못 꿔봤는데! 나한테는 네 아빠 사랑밖에 없었어.
인생 살면서 누릴 께 그것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했다. 아니면 뭘 어쩔 수 있었겠니? (p317)
고닉은 뉴욕 빈민가 브롱크스의 다세대 주택에서 여섯 살 때부터 스물한 살까지 살았다.
그곳은 가난한 이민자들의 거주지였다. 고닉의 엄마는 그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도 그들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찼고, 똑똑해 보였다. 그러나 고닉의 엄마는 브롱크스의 다세대 주택이 아니라 '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p25)'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 당신이 그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열렬하고 절실하게.(p25)'
엄마는 집안일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모든 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 싱크대를, 바닥을, 스토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뭔데?
이것이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이었다. 여기 이 부엌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는 것. 또한 이 부엌에서 엄마는 누구나 존경하고 감탄할 정도로 훌륭히 기능한다. 이 부엌에서 당신이 하는 일을 혐오스러워한다. 어쩌면 나중에 당신 입으로 말한 "여자로 산다는 것의 공허함"에 대해 분노를 키우고 있다. (p26)
엄마는 가부장의 안전지대에서 "사랑"만이 전부라 믿었다. 그러다 그 사랑이 갑자기 세상을 뜬 뒤, 모든 슬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슬픔은 다시 딸에게 전해졌다. 딸은 원하지 않았지만, 딸에게 엄마는 세상이었다. 법이었다. 그때, 딸이 할 수 있는 생각은 한 가지였다.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내가 너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생각. 나의 전부가 '엄마 '일리 없다는 부정.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순간들.
그러나 고닉의 글을 읽으며 알았다. 엄마와 딸은 단지 피로 연결된 혈육만이 아님을.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p301)
글 속에서 고닉과 그의 엄마가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대체로 평범한 대화들을 나누고, 가끔은 실없는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날카로운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글을 읽는 동안, 엄마와 함께 걷는 상상을 자주 했다.
아주 오래전엔 나란히 걸은 적도 있었겠지. 그 장면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살짝 슬퍼졌다.
오늘, 몇 주 만에 엄마 집에 다녀왔다.
최근 일을 다니기 시작한 엄마는 종일 서 있어서 다리가 붓고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가는 종아리, 부은 발, 어쩌면 우리의 산책은 좀 더 뒤로 미뤄질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오래 침묵했다.
그저 우리는 함께였다.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 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과연 그런 진실이 존재하나 싶어진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불운한 운명(엄마는 과부 나는 이혼녀다)을 타고난 무능력한 두 여자, 스스로 행복한 가정이라는 실체를 꾸릴 수 없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다 쇼윈도 앞에 서면 ‘행복한 가정‘이란 건 내 안에서도, 엄마 안에서도 실현되지 못한 한 조각 환상처럼 느껴진다. - P72
모든 일은 언제나 나쁘게 끝나지만 그 비극에도 위엄이란 게 있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야기의 요점은 명확하다. 인생은 비극이라는 것. ‘비극 안에‘ 머물면 인생이라는 지루하고 빈곤한 고통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실 인생이란 게 전부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무의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내가 알기론 가장 중요했다. 의미를 찾는 게 곧 구원이었다. - P87
나는 간발의 차로 겨우 위험에서 빠져나온 사람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느낀 불안이 속속들이 냉정하고 비열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뜨거운 가슴에 날 마구잡이로 끌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몸을 빼지 않았다. 내가 속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 확실한 문제가 있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안전하다.-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