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를 규정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생각하다가 '나'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혹은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조금 침울해지기도 한다.
엄마, 직장인, 딸, 며느리 같은 거 말고,
진짜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게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때론 누군가에게 와~ 하는 시선을 받는 그런 표현이면 좋겠다 싶어질 때 잠시 멈칫한다.
그건, 진짜 '나'인가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니까 여전히 갈팡질팡.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글을 쓸 때마다 주위 환경이 재배치되었다. 이혼이 불행한 게 아니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견고한 사회가 불행하다는 것, 여자의 도리를 따라야 하는 게 아니라 성별 이분법과 그에 따른 차별과 배제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외면했던 나의 입체적인 면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나는 학교 밖 청소년이었기에 일찍이 제도권 밖에서 살아갈 다양한 방식을 모색할 수 있었고 정상 궤도를 이탈했기에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기를 수 있었다. 나는 이혼한 집 딸, 전문대 출신,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라는 몇 가지 단어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밀크티와 공포영화, 비 오는 날, 동물, 따뜻한 대화,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뭔가 이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주 우울하고, 주기적으로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이었다. 쓰는 과정을 통해 나는 배웠다. 사람은 몇 가지 키워드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 <"승은 씨에게 쓰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중에서.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대학에 입학해 다시 처음부터 소설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글은 '나'로부터 시작된 다는 것.
그 이후 쓰게 된 나의 소설들은 대부분 어둡고, 누군가 부재하고, 떠나거나 상처받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은 그냥 개인적인 서사로만 남았다. 늘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생각과, 나의 언어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타인의 모습으로 둔갑시켜 표현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타인을 떠나 표현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여러 가지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 작은 깨달음들은 결국 나를 '소설'에서는 조금 멀어지게 했으나
또 다른 글쓰기를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독서란 책을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한 사람의 시선과 삶의 단편을 기록한 책을 통과할 때마다 나는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이 재배치되었고, 상처를 응시할 수 있었고, 외면했던 감각을 믿게 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관념의 집약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재하는 공간이다.
나에게 '읽다'라는 '경험하다'와 같은 말이었다. 내가 마련한 이 책이 당신에게 작은 자유를 선물하는 하나의 경험이 되길 바란다. 함께 쓰고 읽는 시간을 기록한 이 공간이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도 안전한 그곳이길 바란다. 이제 내 글의 마침표를 열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중에서.
'읽는'다는 것과 '쓴 다는 것'
일상을 매일 살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된 두 행위는 때론 아주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쌓였을 때 느껴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정들을 경험하게 한다.
읽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아가고, 당신의 아픔을, 당신의 공간과 시간을 이해한다.
쓰는 행위를 통해 당신을 통해 알게 될 것들을 다시 '나'에게 대입시켜보면서 진짜 '나'와 마주한다.
때론 그것들은 아픈 상처를, 과거를 떠올려야 하는 힘든 일이 되기도 하고,
즐거운 일을 더 즐겁게 추억하게 되는 신나는 일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건 '읽는' 일과 '쓰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해 가다 보면 누군가를, 사회를, 나를 한 가지의 시선으로 편협하게 바라보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래서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진다는 것. 불편한 일에 대해, 불편한 사회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덜 두려워진다는 것.
이건 내가 경험한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2년 전, 저자의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를 읽었을 때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동안 내가 가진 사회적 편견과,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고,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생각을, 가치를, 편견을 툭, 건드릴 수 있다는 일이, 그런 말을 두려움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저자가 부러웠다.
2년의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간 저자의 책을 다시 만나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 내 이야기가 선정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질까 두려울 정도로 나는 많은 시간 동안 흔들리고 상처받았다. 그렇지만 나의 나약함을 말하고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었기에 아파도 불행하지 않았다. 상처는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고 했던가. 덧붙여, 상처는 연결될 때 더 이상 상처로만 머물지 않는다. 목소리가 목소리를 부른다. 내 글을 통해 나라는 타인이 당신에게 전달되길 바라고, 당신의 이야기도 말해지고 들리길 바란다. 그 과정은 분명 불편한 일이겠지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거라고 믿는다. 나는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자유로우면 좋겠다.' -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저자의 말 중에서
불편한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살아가는 일.
이제 그 목소리들을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달라고, 그래서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로워 지자고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짧은 시간이 참 소중했다.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하는 힘, 살아가는 힘,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 혼자 숨어 힘든 상황을 견디어 낸 이들에게 보내는 다정한 위로였다면
이번 책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는 어떻게 하면 함께 읽고, 쓰는 일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함께 해보자고 손 내밀어 준다.
"도대체 글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이죠? 이렇게 쓴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글을 쓸 때마다 자주 D의 질문을 떠올렸다. 쓰는 일의 의미는 뭘까. 우리가 쓰는 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글이 견고한 세계에 티끌만큼의 흠집이라도 낼 수 있을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질문 앞에서 내가 내놓은 대답은 매번 초라하게 느껴졌다.
- <기꺼이 슬픔에 잠기는 사람들 : 타인에게 상처받고 영향받기> 중에서.
D의 말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고 세상이 갑자기 아름답게 바뀔 리 없다.
불편한 일은 여전히 불편한 채로, 잘못된 일은 여전히 잘못된 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쓴다. 그리고 나는 쓰고 싶어 한다.
저자의 말처럼, 함께 글을 쓰는 일을 통해 타인의 슬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나의 슬픔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말이 주는 힘만큼이나 글이 주는 힘이 크다는 걸 나는 믿는다.
불편한 생각들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글을 읽을 때면 언제부턴가 괜히 고마워진다.
견고한 세계에 티끌만큼의 흠집,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흠집을 내려고 노력했던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고도 믿는다.
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점이 나는 두렵다. 혼자 쓰고 읽는 일기와는 다르게 타인에게 읽히면 내 한계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인식의 한계를 접할 때마다 멈칫하고, 내가 쉽게 타인의 고통을 글의 기폭제로 이용할까 봐 긴장한다. 때로 글은 삶을 쉽게 왜곡하고, 비틀고, 조롱하니까.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폭로하고 해체하는 글쓰기는 가능할까. (중략)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걸 : 멈칫하는 태도가 필요한 순간> 중에서.
만약 내가, '읽는'일을 하지 않았다면,
'쓰는'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해 쉽게 이해한다고 적었을 것이다.
이해해요.라는 말이 때론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때론 얼마나 가벼운 말인지 이제는 안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타인을 향한 평가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도 읽고 쓰는 일을 통해 배웠다.
저자의 글 속에서 나는 다시 '읽고'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로부터 시작된 글쓰기가, 우리를 어떻게 연결해 주는지 생각한다.
그 연결됨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넓은 세계로, 또 다른 인식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다.
생각 없이 쓰는 언어가 실재하는 존재를 어떻게 지우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쉽게 말을 뱉지 않는다. 나는 이런 태도가 글을 쓸 때도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면 문자 언어도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지만, 적어도 글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말을 걸 때는 시대의 감수성에 섬세하게 다가가는 서사와 표현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섬세한 언어에 관한 잣대 역시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구술 생애사나 현장을 전달하는 르포의 경우에는 정제된 언어가 자칫 당사자의 역사나 계급성을 지울 수 있다.
내 표현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누구의 얼굴을 지우는지, 그 표현으로 누가 사회적 공간에서 밀려나는지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편견에 휩싸여 소중한 존재에게 "그러다가 너 맘충돼"라거나 "너 된장녀 같아"라고 말하는 무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비문이나 맞춤법은 수정하면 그만이지만, 차별적인 언어는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고 눈물샘을 건드린다. - <얼굴을 지우는 말들 : 무해한 글을 쓰기 위한 고민> 중에서.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듯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일기장에 남몰래 적는 글이 아니라면 그 글은 언제나 타인을 향해 있다.
자신의 생각이 오롯이 옮겨지는 게 글이라면 글을 쓰기 전에, 아니 다 쓰고 나서라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내가,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결국 그 상처가 다시 돌아 나에게 올 것은 자명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