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님이 아직 지성을 내뿜어 주셔서 정말 다행이다. 애들이 어릴때 읽었던 전집에도 친정엄마께서 추천해 주셨던 책에도 또 내가 직접 보았던 강연이나 책에도 이어령님은 늘 든든히 계셨다. 젊었을때 읽었던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나 몇년전에 읽었던 '지성에서 영성으로' 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따님의 간곡함으로 기독교인이 되기도 하셨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만한 인생의 사건을 겪으시고 만든 책이지만 늘 지적인 충만함이 돋보이는 문체는 여전하였다.
이번책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로 우리 한국인의 탄생이야기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 책의 재미있는 점은 고령의 학자이지만 세대간 격차를 인정하고 배울것은 배우는 노신사의 멋짐이 가득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태명이란 것은 예전엔 없던 것인데 요즘 부부들은 태아의 태명을 짓는것이 대유행이라고 한다. 나도 22년전에 출산을 했지만 그 직후에 후배들이 태명을 짓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태명이 없었지만 태명에 대해선 익숙하다.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는 아주 놀랄 일인 것 같다.
태명에서도 우리나라의 예전 이름 짓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주신다. '언년이, 간난이, 섭섭이, 막순이, 분례'.. 분례를 설명하면서 영미권의 홀리 쉿을 설명해 주시는 것에는 아주 감탄했다. 그러면서 신세대의 태명인 '쑥쑥이, 축복이' 등이 얼마나 축복된 이름들인지 열린 마음으로 설명해 주신다. 외국에도 없는 개념이라 우리의 태명이 신기한 모양이다. 영국남자랑 결혼한 한 한국인 새댁은 마카롱을 좋아하는 신랑을 따라 '까롱이'로 지었다고 한다. 참 이쁜 이름이라며 즐거워 하신다. 한국인의 작명풍습을 제대로 짚어주고 있다.
몽고반점에 대한 이야기, 삼신할매에 대한 이야기, 막이름에 대한 이야기등을 읽고 있노라면 이 책은 신세대들에게는 신기함을, 우리같은 중년에게는 어린시절에 읽은 한국전쟁 이전의 소설들을, 부모님 세대는 좀 더 가까운 이야기로 와닿을 것 같다. 기저기, 어부바, 배냇저고리 같은 우리들의 한국인 태생에 관한 이야기를 이 두꺼운 책에 빠짐없이 담아내고 있어서 숫자를 매겨서 짧게 짧게 끊고 넘어가는 글들이라 지식적인 것들을 습득하면서도 이어령님만의 지성을 느끼고 한편의 수필같은 느낌까지 든다. 그리고 역시 그 박식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이 이야기들에 이렇게 뼈와 살을 붙이고 우리가 속한 그 어디에선가의 뼛속깊은 한국인만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