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9 저자: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좋아하는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지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팬덤. 팬픽이란게 있다고 들어만 봤지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장르였다. 오래전 어느 책에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 책과 ‘일 포스티노’ 영화를 소개해 놓은 걸 읽고 궁금해서 갖춰뒀었다. 작가 자신이 푹 빠졌던 시인 네루다의 삶의 몇 장면을 상상해서 만들어낸 소설이었다. 얇고 금세 읽혔다. 대체로 경쾌한 분위기로 시작해서 계속 밝게 이어지다 노벨상 수상 축하파티에서 흥겨움은 절정에 이른다. 후반부는 군사 쿠데타와 네루다의 죽음, 네루다 전담 우체부 마리오의 어두운 앞날로 마무리되었다. 칠레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소설과 소설 원작의 영화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계란 굴리는 마리오-베아트리스 커플의 첫 섹스나, 노벨상 파티 기념 격정적인 섹스 같은 건 나름 웃기라고 쓴 것 같긴 한데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재미있는 상상력이네, 하고 읽을 만했다.
많은 비유-메타포가 등장했다. 진부하지 않은 비유를 건져올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결국 속담처럼 남들이 닳디닳게 쓴 비유들을 키치하게 읊는 게 평범한 사람의 말이다. 시인과 소설가는 그걸 넘어서려고 열심히 단어를 고르고 이야기를 짓고 할 것이다. 문득 네루다가 시를 사랑한 것처럼, 마리오가 베아트리스를 사랑한 것처럼, 작가가 네루다를 사랑한 것처럼 무언가에 푹 빠져 본 기억이 있는가 돌아보았다. 꾹꾹 눌러쓸만큼 모아놓은 말들이 있을까 뒤적였다. 연기처럼 만져지지 않고 먼지처럼 자잘한 것만 있긴 있었는데 이젠 없는 것 같다. 그럼 남이 진지하게 덕질해서 남겨 놓은 걸 재미있게 읽으며 보내도 그만이다. 쿠데타 같은 폭력적인 삶이 덮쳐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편지 배달하고 전화 받고 라면을 삶고 그러다 가끔 들여다보고 뭐라도 쓰고 싶으면 쓰고, 읽고 쓰려고 모두가 위대해질 필요는 없다.
+밑줄 긋기
-“번드르르한 말처럼 사악한 마약은 없어. 출구석 술집년을 베네치아 공주처럼 느끼게 만들지. 그리고 나중에 진실의 순간이 오면, 즉 현실로 되돌아오면 말이란 부도수표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지. 네 미소가 나비보다 더 높이 난다는 말보다 술주정꾼이 주점에서 네 엉덩짝을 치근덕거리는 게 천만번 낫지.”
베아트리스가 펄쩍 뛰었다.
“나비처럼 ‘번진다’고 했어요.”
“난다고 하든 번진다고 하든 그게 그거야. 왠지 알아? 말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야. 허공에서 사라지는 불꽃놀이일 뿐이라고.” (63, 산통을 깨뜨리는 베아트리스의 어머니는 그와중에 비유를 몇 개나 썼냐)
-“닭대가리 같으니! 지금은 네 미소가 한 마리 나비겠지. 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 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 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 엉덩짝은 범선 돛, 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 퍼질러 잠이나 자!” (67, 이쯤 되면 베아트리스네 엄마도 전투적인 시인 아닐까)
-크리스마스인데도 여기는 눈이 오지 않으니 정말 이상하죠. 틀림없이 양키 제국주의 때문일 거예요. (121, 사회주의자의 이게 다 ~때문 시전. 아름답다 할 메타포가 넘치는데 난 자꾸 이런 블랙 유머에만 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