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참을 수 없는
  • 제인 에어 1
  • 샬럿 브론테
  • 10,800원 (10%600)
  • 2010-03-19
  • : 577
-20260912 저자: 샬럿 브론테.

과외 선생이 된다는 건 모르는 가정 안에 풍덩 들어간다는 뜻이다. 공부 공간이 좁고 답답한 발코니인데 그 안에 책상을 놓고 이혼한 제 아빠(이름으로 칭해짐)를 쏙 빼닮았다는 아이 얼굴에 관한 품평을 들은 뒤 문이 닫히고. 엄마가 아빠와 싸우고 집을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다고 걱정하는 두 남매를 보고(엄마는 내가 과외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 장 본 걸 들고 들어오셨다). 일본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다가 건너온 아이는 한국이 아직도 낯설고, 거실에 앉은 남자 어른을 보고 아빠니? 했더니 아빠 아니에요! 꽥 소리지르기도 하고. 열이 펄펄 끓는 아이에게 수업 대신 타이레놀을 먹이고 자리에 눕혀 재우고 돌아오기도 하고. 엄마와 말이 안 통해 말티즈 강아지를 동생처럼 끌어안고 하늘아, 하는 걸 떼어놓고 책상 앞에 앉혀야 하고. 엄마가 맛있는 배달 점심 식사와 체리나 골드키위 같은 당시엔 비싼 과일을 간식으로 주면서 시험 공부를 하라고 선생과 아이를 방안에 다섯 시간 가두기(?)도 하고. 면접만 갔던 집에 애아빠가 이상한 질문과 반응만 해대서(아마도 정신질환자였다) 아이가 울상으로 아빠, 하고 말리던 기억…
나는 그다지 길게 맡은 학생이 없었기 때문에 만난 학생 수가 많았고, 특이한 부모와 온갖 가정사를 마주한 날이 많았다.

고아로 외삼촌이 돌아가신 외숙모 집에서 학대 당하며 머물던 어린 제인 에어도 로우드 학교를 거쳐 로체스터의 손필드 장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더구나 18세의 입주 가정교사란, 이 집을 나가면 거처할 곳 없는 신세란, 그런데 나보다 나이가 두 배보다 더 많은 권위주의적인 학생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횡설수설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제인 에어의 타고난 기질과 유소년기에 지독한 더부살이를 한 탓에 형성된 체념과 고집이 그나마 어떤 사람을 겪든 잘 참고 지나가게 하는 듯보였다. 나는 그게 안 되서 힘들다. 학생이 힘들고 학부모가 힘들고 동료들이 힘들다. 좋은 사람들도 많지만 소수의 무례하고 추궁해대기 바쁜 사람들 때문에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지만 가정교사 제인 에어를 생각해 봐, 퇴근이라는 게 사실상 없다!

점점 가정교사는 아이만 가르치고 돌보는 것이 아니라, 손님 맞이 음식 준비도 거들고, 응접실에서 노다거리는 귀하신 분들의 병풍도 되어주고, 방화의 불길도 잡고, 뭔가의 공격으로 피투성이가 된 로체스터의 친구 간호도 밤새 해주고, 결정적으로 변덕스럽고 혼란스러운 주인의 말벗이 되어 본인까지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그렇지만 두들겨 패는 외사촌 외의 남자 사람이랑 이렇게 오래 같이 지내본 것도 처음이고, 그 남자가 자꾸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네가 필요해, 하면서 애절하게 굴고,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사랑의 감정이 솟아나기도 한다.

생각보다 이 소설의 장르는 미스터리/공포/스릴러에 가까웠다. 고딕 어쩌구… 그러니까 애기 때 축약판으로 보고 기억한 다락방의 미친 여자 나오는 책인 것도 틀리진 않은데 이미 알고 보려니까 막 두근거리는 느낌이 없는 건 좀 아쉽다.

로체스터의 -하오체는 많이 어색하고 짜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인이 주인님 거리는 것도 거슬리지만 그게 둘의 고용-피고용 권력 관계를 잘 보여주는 호칭이기도 하니까, 집주인 맞으니까 뭐 여기서는 내가 체념하기로 했다.

갑자기 제인 에어를 읽게 된 건 에이드리언 리치의 서평을 읽어서이다. 폭풍의 언덕보다 제인 에어가 나아, 하는 그 말을 확인하려면 남은 제인 에어2권과 폭풍의 언덕도 봐야 한다. 고전이란...두께 참… 그래도 이렇게 두껍게 이야기를 계속 토해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닌 건 알겠으니, 이미 리치 선생한테 엄청 스포일러 당했지만 묵묵히 읽긴 읽어야겠다.

+밑줄 긋기
-왜 나는 늘 고통을 겪고, 늘 험상궂은 표정으로 위협받고, 늘 욕을 먹고, 영원히 비난받아야만 했던가? 왜 나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지 못했던가? 왜 내가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기 위해 애쓰면 아무 소용이 없었던가?(열 살에 이런 의문으로 고통 받는 건 좀 가혹하다. 그런데 내 열 살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기분이다.)

-나는 내 신분을 희생해 자유를 사고 싶을 정도로 담대한 용기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리드 집안에서 쫓겨나면 갈데 없고 먹고 살 길 없어...그런 시대도 있고 여전히 그런 사람도 있긴 하니까…)

-인간이란 본래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다. 그런 사랑을 베풀 만한 보다 가치 있는 대상이 없던 나로서는 작은 허수아비처럼 색 바래고 남루해진 조각 인형을 그저 사랑하고 아끼는 데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애를 쓸 뿐이었다.(그래서인가 너 커서 내 보기엔 망가진 허수아비 같은 남자한테 막 사랑에 빠지고 그래…)

-‘모두들 리드 부인이 내 은인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렇다면 은인이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거야.’

-나는 난생처음으로 복수 비슷한 감정을 맛보았다. 그 맛은 삼키면 따뜻하고 풍미 넘치는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맛이었다. 그러나 쇠붙이 냄새나 뭔가 부식하는 듯한 냄새가 나는 그 뒷맛은, 독극물을 먹은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복수 시리즈만 보았지, 저런 비슷한 감정은 느낀 적이 있던가...생각보다 아예 나쁜 놈으로 살진 않았나 봄)

-“하지만 피할 길이 없다면 참는 게 네 의무일 거야. 어쩔 수 없이 참는 게 네 운명인 일을 ‘난 못 참아.’라고 말한다면 그건 나약하고 어리석은 짓이야.”(병에 걸려 얼마 후 세상을 떠날 아직 어린 아이 헬렌이 이런 달관을 한 게 씁쓸했다. 나도 잘 못 참는 ‘못 참아…’)

-내 본성 안에는 한곳에 안착하지 못하는 들뜬 심정이 내재해 있었다. 어떤 때는 그런 심정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마음을 교란했다.(동아시아인들은 그걸 역마살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영국엔 그런 이름이 없었나 보다.)

-인간이란 평온한 삶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헛된 일이다. 인간은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활동을 찾을 수 없으면 만들어낸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운명보다도 더 정적인 운명에 처해지고 있지만,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무언의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반란의 제인)

-나는 서서히 그런 삶이 지닌 안정되고 편안한 특권적 가치를 고마워하지 않는 심리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차라리 불확실할지언정 전력을 다해 발버둥 치며 분투하는 폭풍우 속에 내던져진 삶을 살았더라면, 그리고 거칠고 험하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지금 내가 그 한가운데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평온한 삶을 갈망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더라면,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는가!(폭풍우 그거 굳이 왜...좋지 않아…)

-“주인님, 방금 제게 ‘카도’를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르치는 학생의 향상에 대한 칭찬이야말로 선생님들이 가장 탐내는 보상이지요.”(난 일찍부터 싼타 할아버지 따위 믿지 않았어)

-그런 변덕스러운 기분 상태가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 변화무쌍한 기분이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그런 감정의 기복이 나와 전혀 무관한 원인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득도한 스님 같은 마음 가짐. 그러나 말만 그러고 결국 남의 감정 기복에 휩쓸리고 마는 제인...)

-“저는요, 주인님. 주인님께서 저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세상 구경을 더 많이 하셨다는 이유로 제게 명령할 권리를 가지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권리는 선생님께서 그 시간과 경험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달려 있지요.”(꼬박꼬박 말대꾸 잘해서 마음에 드는 제인. 대개는 벌받고 짤리고 할 건데 로체스터 ‘나한테 이런 사람 너가 처음이야’를 시전하는 듯)

-당신이 설령 다른 대다수 사람들과 비교하여 다른 틀에 넣어져 만들어진 것 같은 성격의 소유자이더라도 그건 당신 자신의 공이 아니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요.(집주인 아저씨는 가끔 짜치는 말투로 바른 말도 하긴 함)

-당신에게서 언뜻언뜻 조밀한 새장 창살 사이로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을 던지고 있는 새 모습을 보게 되오. 활기차고, 들떠 있고, 결연한 포로처럼 갇혀 있는 새 말이오. 자유롭게 풀려나기만 하면 그 새는 구름처럼 훨훨 높이 날아오를 거요. 여전히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소?(나도 새야.)

-그러니 앞으로는 계속해서 우리 두 사람이 영원히 단절되어 있다는 말을 반복해야만 해.─하지만 살아 숨 쉬고 생각할 수 있는 한 나는 분명히 그 사람을 사랑할 거야.(이루지 못할 사랑을 놓지 못하는 마음. 그거 이 중년한테는 너무 희미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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