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참을 수 없는
잘 지내.
반유행열반인  2026/08/29 17:09
  • 여름, 스피드
  • 김봉곤
  • 11,700원 (10%650)
  • 2018-06-20
  • : 2,407
-20260829 저자: 김봉곤. 재독.

몇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이제 이 여름 끄트머리에 이 소설을 다시 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저 여기 있어요!

첫 읽기는 8년 전 전자책으로, 이번에는 친구가 읽던 걸 물려 받아 종이책으로 읽는다. 설렜다. 소설을 읽기 시작하며 설렜던 것이 얼마만인가.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문장이지만 화자도 설레보였다. 재기발랄한 소설가를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독자들은 잃었다. 잊었다. 박현욱 소설책 작가의 말에서 소설가는 편집자로서 아직 책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읽으면서, 여전히 소설가이면 좋겠다. 펴내건 아니건 일단 쓰고 있으면 운 좋으면 또 닿겠지.
문장 하나하나 만날 때마다 놀랐다. 이 소설이 이번 달에 나온 것이라면 좋았겠다. 그렇더라도 그때만큼 화제가 될지는 몰라도, 나는 새로운 작가를 만났어, 하고 어디 이야기하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멈추는데 사실 내가 뭐에 씌여서 이런 걸 수도, 남들은 안 그럴 수도 있다.
플래그 스티커가 군데군데 문장들을 가리키고 있어서 나랑 다른 밑줄을 구경하는 재미까지 챙겼다.

작가의 두 소설집은 청년기의 (어쩌면 마지막) 불꽃 같은게 펑펑 터지는 것처럼 읽혔다. 이 젊었던 이는 나이 먹음을 어떻게 문장에 섞었을지 궁금하다. 나만 그러냐.

이 소설집의 첫 소설 ‘컬리지 포크’를 읽었을 때, 화자가 교환학생으로 간 곳이 교토의 예술학교라서 설렘을 넘어 반가웠다. 나도 갈 거야 교토… 오래된 것이 아직 남은 큰 도시가 넌 20세기 사람이었단다, 하고 알려줄런지. 앙증맞은 문장들이 넘쳐서 초반부터 밑줄을 벅벅 긋고 싶은 걸 참았다.

이번 읽기는 망한 사랑보다 망하기 전의 사랑에 더 눈길이 갔다. 그게 왜 이렇게 생생할까 나는 왜 같이 두근거릴까 나는 왜 게이한테 공감하고 있을까 아무렴 어때 하고 장면과 문장을 즐겼다.

‘여름, 스피드’. 소설에다 쓰고 나락갈래 안 쓰고 버틸래 하면 나는 안 쓸게, 하는 거 보니 소설에 대한 사랑이 많이 식었다. 그냥 인정 욕구나 인생 건 어그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몰라. 화이팅.

‘디스코 멜랑콜리아’에서 남산과 힐튼 호텔이 잠시 등장하는데, 그 호텔 이제 없다. 있었다는 것만 알지, 그 둘레길만 지나가봤지, 가 본 적은 없는데도 책에만 남은 장소는 아쉽다. 책에나마 남았다.

‘라스트 러브 송’을 읽을 땐 헤어진 사람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 없지, 그러면서 어정쩡한 기분을 애도하는 상황을 상상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헤어진 사람과 다름 없지 않지, 아닌가 다른가 안 다른가, 어쨌거나 양쪽 다 최대한 나중에 느끼고 싶은 기분이다.

‘밝은 방’은 이전 읽기 땐 정신 없고 뭔말 하는 거야 싶었는데, 율리시스를 1/3쯤 읽고 왔더니(박상륭 전집도 2/3, 또 또 더 충분히 재미없는 것들 두꺼운 것들) 충분히 너그러워져서 후후 이 정도는 ㅈ밥이지, 어디 더 정신 없어져 봐라, 더 해 봐, 더 해 봐.

마지막으로 읽은 중편은 음, 아니 에르노 게이 버전(이렇게 미리 쓰고 계속 읽었더니 아니 에르노가, 아니 그 사람 소설 이름-내가 안 읽은-이 등장한다). 이런 걸 써야 신춘문예에 당선되는구나. 되었었구나. 오토픽션의 윤리에 대해서 걱정하며 써야 하는 나라/시대/판이 되었으니 이젠 아닐 수도 있겠다. 나는 그냥 인간 관계를 잘 못 간수하면 사달이 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아니 문학을 하려면, 연애를 하려면 프랑스에서 태어났어야 해. 아무렴 더 해 봐.

힘들게 쓴 글은 힘들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뭐 이제는 읽는 건 힘들지 말아야지, 그냥 후려갈긴 걸 수도 있어, 하고 여유를 부린다. 어쩜 그땐 이 걸쭉한 사랑 타령을 읽을 준비가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간 700권이 넘는 책이 스쳐갔고, 사람도 시간도 장면도 장소도 그랬다. 오토픽션 까는 듯한 소리하다가 내가 쓰는 독후감을 보니 아, 결국 나도 비슷한 짓을 하고 있네? 하면 어딜 감히,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겠다. 말은 이렇게 했는데 사실 휴일 하루를 할애해 이 소설집과 ‘Auto‘를 지금 나만큼 진지하게 읽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작가 본인 제외. 심지어 작가 본인마저 오래 안 읽었을 가능성이 높을까.)

오늘 아침에는 몇 주 만에 드립 커피를 두 잔 분량 정도 마셨기 때문에 이 읽기가 충분히 올려치기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 책 읽을 때마다 그렇게 되냐고. 그냥 좋은 건 좋다고 말해요. 책을 회수하고 전자책에서 글자들을 지우고 분서갱유 난리를 부려도 나한테는 2018년, 2020년의 그 책들이 있어서 내키면 읽을 수 있다. 읽어도 된다. 생생한 기분과 감정까지 베껴온 건 아닐 거잖아.


+밑줄 긋기
-어쩌면 나는 젖떼기와 애도 그 모두에 실패한 것일지도 몰랐다. (17, ‘컬리지 포크’ 중. 연애의 끝은 평생 어려워서 막 60, 70대도 치정 살인하고 그러잖아…)

--책을 만든다.
-소설을 읽고 쓴다.
딱 두 줄. 명료했다. (18, 정말, 간결한 다짐인데. 아직도 하고 있나요? ‘읽힌다’는 자신의 몫이 아니니까)

-“(…)하지면 현실과 글쓰기, 현실과 환상, 현실과 자신의 소설이 뒤섞여 직조되는 소설은 언제든 유효합니다.”라고 그는 말해주었다. (20, 나도 그 말을 받아 적었다. 그러고나서 끄트머리를 읽으며 작가는 유효하고 싶었네, 영리하지만 밥맛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호의 제국’은 어렵게 구한 책이라고 형섭이 말했지만 감사 인사도 잊은 채 손때가 묻고 가장자리가 구겨진 그 책을 안고 나는 으흐흐흐 하다가 베란다로 뛰쳐나가 도시를 내려다보며 또 으흐흐흐 웃었다. 건물은 낮고 나무는 높아! 감탄하면서. (23, 화자의 연애 감정과 교토의 낮은 스카이라인에 대한 애정도 섞여 있겠지만, 뭔가 책변태들은 그럴만 하지 할 장면 아닌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누군가를 위협하는 것도 너무나 손쉬웠다. 손쉬운 만큼 너무 위험했다. 그리고 그도 나도 터무니없이 나약했다. (30, 게이 혐오 테러를 발견하고 놀란 가슴, 나까지 덩달아 놀라 내 몸은 문장을 기억하지만 서사는 대체로 잊었구나 다행이다 재밌겠다 하는 마음과 장면의 불편함이 뒤섞였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꼭 글을 쓰는 사람만을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생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그러나 편집자든 작가든 좋은 독자여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란 말은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그는 편집은 꽃다발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말했다. (41,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무식하고 무례했던 나에게 에하라 선생님이랑 화자 둘이서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시네.)

-사실 나는 언젠가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좋은 걸 가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그건 내것이 아니라고.(61-62, ‘여름, 스피드’ 중. 지금보면 소름 돋지만 설마 본인이 일부러 지뢰를 묻어두진 않았겠지...설마?! 소설 쓰랬지 누가 소설 살래)

-아는 척과 모르는 척. 둘 중에 무엇이 날 망쳐왔는지 모르겠다. (100, ‘디스코 멜랑콜리아’ 중. 나는 압도적으로 앞의 쪽)

-췌사:쓸데 없이 덧붙인 군더더기 말(129, 2018년에도 찾아봤는데 독후감을 돌아보니 체사(오타냄), 란 말도 알게 된 사실만 적어 놓고 뜻은 안 적어놔서 다시 찾아봤다. 그외에 는개, 조크스트랩, 카멜토 같은 건 어렴풋이 기억은 나는데 안 나도 좋을 것들…)

-한편, “불행한 삶을 사는 대신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길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하는 문학 선생님의 말에 망설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던 예전의 나를 떠올려보기도 한다. (208, 뛰어남을 얻지 못하는 대신 행복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손, 이미 원하는 걸 가졌으니 뛰어남도 하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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