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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20260726 저자:박상륭.


‘산해기’를 읽다 말고 전집의 앞부분을 펼쳤다. 마침 내가 좋아하고 또 슬퍼하는 ‘죽음의 한 연구‘의 큰 사건, 곡진한 여성 수도부 한 명이 몹쓸 촛불중 때문에 죽고, 그 죽음을 오래도록 애도하는 육조의 모습을 한동안 좇아 읽었다. 그러고나서 다시 산해기를 읽으니 그동안 읽은 장편 소설들의 씨앗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박상륭의 세계관은 제법 일관성 있고 또 끝없이 변주되고 있었다.
그래서 읽던 중간에 같이 펴놓고 보라고 일부로 따로 떼어 놓은 주석책을 아주 오랜만에 폈다. 편집자의 말과 연보를 보았다. 아마 박상륭 전집 사고 금세 봤을 건데 또 처음 읽는 것 같았다. 산해기가 언제쯤 나온 책인가, 궁금했는데 정작 그건 안 들여다봤다.
한 책을 보는 중이면 거기에 충실하자, 주의라서 책 아닌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아니면 아예 치워버리고 다른 책을 보지, 하던 나였다. 전집 덕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는지도 모른 채 찾는, 아마도 ‘박상륭 읽기’를 하고 있다.

산문집이라고 해서 펼쳤는데, 이 글 속 목소리도 직접 저자가 나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장편소설과 차이점을 크게 못 느꼈다. 공주를 납치하는 에켄드리아 독룡, 산해경의 이상한 동물처럼 이상한 인간들이 사는 이상한 세상을 떠도는 자라투스트라 등의 입을 빌려 세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설명을 하려고 한다. 이원론은 그렇게나 싫은지, 늘 3개의 우주, 색, 삼각관계, 그렇게 셋을 위한 왈츠는 아니고 넋두리 같은 걸 독자 들으라고 잔뜩 적어놨다. 그리고 어딜 가든 열여섯 아름답고 무서운 소녀의 이미지가 따라온다. 주석도 안 보고 신화도 성경도 힌두교도 불교도 잘 모르는 나는 그냥 저자가 풀어놓은대로 말장난을 즐기며 따라가기는 따라갔다. 오랜만에 박상륭체를 읽으니 반가운 친구 내지 은사님을 만난 기분이었다.

읽었다고는 해도 뭐 하나 설명해 봐, 하면 아는 게 없고, 이거 읽었지, 하고 말 나눌 사람을 찾기도 어려운 책들이 있다. 고독한 읽기이지만, 나무 위 상자에 갇히고, 지하 굴속에 산 채로 묻히고, 발이 붓도록 계속 떠돌아야 하는 이야기 속 인물들만큼은 조금도 못 미치니, 엄살을 떨 수도 없다. 그저 박상륭 전집에서 ‘륭’(칠조어론)에 이어 ‘상‘(장편소설과 산문집)을 다 봤다, 이제 ’박‘(단편소설집)만 남았다, 자랑 아닌 자랑, 미련맞음의 전시, 연꽃 아닌 개망초 위의 보석(돼지 목에 진주, 소 귀에 경 읽기) 말고 내놓을 게 별로 없다. 단편까지 전집 다 읽고 나면, ’죽음의 한 연구‘를 한 번 더 볼까, 아주 나아아아아아중에, 생각을 하는데 ’칠조어론‘은 다시 보라 하면 살려주세요, 할 것 같다. 이렇게 저자가 꾼 악몽인지 길몽인지 계시몽인지 모를 꿈을 더듬더듬 짚어가는 중이다.


+밑줄 긋기
-한 삶(지바)이, 육신에 억류되기. 육신은, 헤쳐나가기에 그중 어려운(고) 바다(해)-그 한 바닷물은 죽음, 그 간단 없는 흐름은 노쇠, 풍랑은 병, 삶(지바)은 한 조각의 조그만 조각배, 를 뒤집어엎으려 덤비는 상어며 고래 떼는, 만족을 모르는 욕망, 마라, 이 궂디궂은 밤, 방위도, 그 거리의 멀고 가까움도 모르는, 피안을 향해 유정은 항해에 나섰으되, 차안 객줏집에 내걸린 흐린 등불 몇 개밖에, 세상은 왼통 어두움뿐이며, 쉼 없는 흐름뿐이며, 풍랑뿐이며, 배고픈 상어 떼며, 아으, 차안 객줏집에 내걸린 홍등 몇 개, (2620, 삶은 고해. 매번 반복되는 괴로움의 바다, 나에게는 한 번 뿐인.)

-하으 그러고 보니, ‘물질주의’가 일어난 날, 동시적으로, 공자가 이해하고 있는 그 ‘그림자’가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말이군입지. 조직이라든, 말입지, 제도라든, 말입지, 율법이라든, 말입지, 모든 자유스러운 정신을 억압하는, 끊어낼 수 없는 줄, 심지어는 운명보다도 더 강인한 줄-그런즉슨 아으 무정부주의 만세?(2644, ‘그림자를 판 사나이’도 있는데 이야기 속 웅공자는 그림자를 없애려고 온갖 애를 써도 실패한다.)

-어쩌면, 귀의 독후감 같은 것이라고나 일렀으면 싶은,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하려는 것인데, 그럼에도, 귀를 말하려 하며, 대략이라도, (귀에 관해) 밝힌 건 밝혀두고 넘어가야, 귀의 독후감이, 귀의 문맹자가 엮어내는, 같잖은 소리만은 아니라는, 그런 변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후감’이란, 알다시피, ‘독서’를 전문 업으로 삼지 않은, 일반적 독자들의 어떤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을 이르는 것이기도 하여서, 열의 독자가 있다면, 열의 독후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 만하다 할 것인데, 독후감이란 그러니, 독자의 사견, 편견, 심지어는 맹안에 의존해 있음도, 쉽게 부정할 수도 있는 얘기는 아니다 할 것이다. 이 얘기는 그런 의미에서, ‘귀의 독후감’이라 이른 것이다. (2650, 귀를 읽기 전 미리, 독후감은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지, 그러니 내가 오독해도 뭐라하지 마러, 이렇게 밑밥부터 깔고 시작한다.)

-자아란, 자기를 흘겨보는 눈을, 둘씩이나, 셋씩이나, 다섯씩이나 되게, 너무 많이, 그리고 크게 해 갖고 있는 것이 탈이다. 아니면, 저렇게나 광활한 우주를 내어다보려하며, 눈을 너무 적게, 그리고 작게 해 갖고 있게 된 것이 탈이다. (2674,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나나니(말벌)(2692, 둘은 완전 다른 벌 종류인데 나나니 나올 때마다 계속 말벌이 괄호로 따라다니는 게 저자의 주석인지 편집자의 주석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다르다.)

-그리고도 어쩌면, 모든 영혼들의 무게를 달아보러 오시는 이는, 따로 어디 밖에서 오는 자이기보다는, 유정들 각자가, 자기들의 영혼의 값을 매기는 자들이나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유정들 각자가, 자신들에 대하여 최후의 대심판관이 아니겠는가 하는데 말씀입지요,…...(2728, 구원은 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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