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6 저자: 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얼마 전 까마귀가 비둘기를 낚아채 가는 장면을 보았다. 날지 못하는 비둘기는 이미 많이 다친 것처럼 보였다. 겨우겨우 도로 중앙분리대 사이에 서서 인도로 걸어가려고 시도했지만 잘 안 되었다. 길 양옆 가로수에 까마귀가 한 마리씩, 두 마리가 번갈아 차가 오면 다시 원래 자리로 갔다가 또다시 비둘기를 공격하러 도로로 내려왔다. 어느 순간, 한 까마귀가 입에 뭔가를 물고 날아올랐고, 다른 까마귀는 그 뒤를 따랐다. 까마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까마귀가 청소 동물인 건 알았지만 이번엔 좀 성질이 급했다. 아직 숨이 붙은 비둘기를 잡아가는 장면이 충격이었다.
같이 지켜보던 곁의 사람과 까마귀는 그럼 까마귀 사체도 먹을까? 하고 궁금해했다. 검색해보니 까마귀 장례식이란 게 있다고 했다. 죽은 까마귀를 산 까마귀들이 둘러싸고 한참을 있는다고 했다.
생물학자이자 균류학자인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까마귀 장례식 이야기가 나와서 약간 반가웠다.
제목에 끌려 고른 책이다. 자연도 나오고 퀴어도 나온다. 원제는 Forest Euphoria, 숲의 희열 정도겠다. 그런데 둘다 센 제목이지만 글은 그냥 평범한 에세이나 일기장으로 읽혔다. 중간에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균류 묘사도 나오지만, 저자 자신의 감정과 정체성에 대한 수사로만 읽혔다. 이전에 그리 좋지 못하게 읽었던 퀴어 작가의 에세이가 생각났다. 비슷했다.
그래도 도움되는 한 구절은 찾았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나오는 부분인데 저자와 다르게 짧고 소중한 시간이 아닌, 곧 흘러갈 시간이라는 마음이 남았다.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 있더라도 이게 계속되지는 않을 것을, 지나가고 변화할 것을 알았다.
균류와 버섯에 관한 이야기가 기대만큼 많이 나오지 않았다. 퀴어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연의 다양성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여러 번 사용한 용어이지만, 그냥 선언 내지 두루뭉술하게 갖다 붙인 느낌이었다. 양면에서 다 새로운 앎이나 느낌을 주지 못했다.
나는 하루 대부분이 자연과 멀다. 가장 가까운 자연은 매일 마주치는 비둘기와 까치, 까마귀, 인공조성된 가로수와 조경수 정도이다. 그마저도 늘 실내에 갇혀 시간을 보내느라 짧게 본다. 걸어 오가는 출퇴근 시간이 그나마 위안의 시간이다. 서울의 숲과 산은 사람이 너무 많다. 단 몇 분도 혼자 오롯이 산을 즐기기 어렵다. 혼자서 10분 만이라도 아무도 없는 야외에 있어봤으면 좋겠다.
+밑줄 긋기
-물과 식물에 대해 죄를 저지르고(비록 잔가지 하나를 꺾었을지언정) 속죄하지 않으면 이승을 하직했을 때 세상 모든 식물의 정령이 그의 앞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천국에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아우성친다. (25-26)
-종을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은 존경과 칭송의 행위다.(98)
-까마귀와 도래까마귀는 장례를 치른다. 죽은 까마귀 주위로 모여들어 서로에게 열성적으로 이야기한다. 몇몇은 작대기나 반짝거리는 물건 같은 제물을 사체에 올린다. (125)
-“여긴 숨을 데가 없어!” 그가 물었다. “무엇으로부터 숨으려고?” 내가 대답했다. “모든 것으로부터!”(179)
-궁극적 특권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으면서도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고 자신을 물질적으로 지탱할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세계가 더워지고 오염되면서, 숨을 곳이 끊임없이 파괴되면서 보이지 않을 공간은 점점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 (180,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 였나 보다. 상류층이 되어야 하는가…)
-10년은 가늠할 수 없는 기간이다.
45분은 금세 지나간다. (242, 이것이 오늘의 위로)
-“균류는 따돌림받는 식물로 치부된다. 요란한 복장으로 길가에서 구걸하는 거지처럼 그들은 관심을 사려 하지만 조금도 얻지 못한다.”(253, 균류학자 배닝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