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0 단요.
책을 펴자 담배 냄새가 훅 풍겼다. 찝찝하고 더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 잘 몰라도 대충 돈과 투기에 대한 책같으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고책을 사서 뭔 향수 뿌렸나? 한 적은 있어도 이런 독서간접흡연은 또 처음이다.
2021년 6월, 금융 투자라는 걸 처음 시작하면서 분산투자랍시고 이거저거 푼푼이 다 사 모았다. 그때 석유에도 투자하고 싶은데, 진짜 선물은 어렵고 무서우니까 삼성WTI원유파생1(Ce)이라는 펀드에 가입했다. 고위험 상품이라서 이걸 사려면 주식을 몇 년 한 것처럼 거짓말 쳐서 투자 성향을 맞춰야 했다. 한 달 동안 총 400만원을 사 모았다. 그러고나서 무슨 전쟁이 터지고 수익률이 저게 맞냐 싶게(+80퍼센트) 올라가는 걸 관망했다. 그때 난 수험생활 중이라 막 적극적으로 뭘 어쩌지 못했...다고는 해도 사실 다른 종목들 뒤지게 사고팔고 많이 했다. 주식해서 공부 못했네. 하여간에 석유 펀드는 네 번에 걸쳐 100만원 언저리씩 분할 매도를 했고, 2024년에 마지막 판매까지 총83만원 정도 수익이 났다. AI에게 연수익률로 따져보라니 7.7퍼센트라고, 은행보다는 나았겠다. 아무리 중간에 얼마까지 올라도 제대로 팔 줄 모르면(늘 매도 시점이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다) 팔자 고치긴 틀린 것이다… 욕심 안 낸 건 잘했지만 사실상 투자라기 보단 방치하다 정리한 수준이다.
투자랍시고 4년 정도 주식이니 ETF니 채권이니 사고 팔고 하다보니 깨달은 점이 있다. 나처럼 수익 못 내는 사람은 그냥 노동력 팔아 임금 받는 게 제일 수익률 높은 벌이란 것이다. 그러느라 몸이랑 마음 갉아 먹는 게 돈으로 못 따져서 그렇지. 그렇다고 투자는 안 갉아 먹냐. 하여간에 돈 자체가 못된 건 아니지만 못됐다. 자본주의 못됐어. 그만 갉아 먹어. 난 부자가 못 됐어.
소설 속 화자는 00인버스 2X WTI원유 선물 ETN이라는 데 투자했다. ‘즉, 기초 자산인 <WTI원유 선물>의 시세가 1퍼센트 내려가면 이 종목은 2퍼센트가 올랐다.’(66) 그렇다고 한다. 나랑 정반대 방향에 투자를 한 셈이다. 나보고 망해라 망해라 했겠군. 시기는 좀 다르다만.
제목만 보고 인생 막장 나락가는 서사를 지레짐작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투자에 대해서 뭐라고뭐라고 막 하는 데 저런 거 하나도 모르는 내가 금융 계좌를 갖고 있는게 애초에 맞나 싶지만, 뭐 안 날려먹으면 그냥 잘한 거래잖아… 소설 속 세계는 악인이랄 것도 없고(정운채가 악인이길 내심 바랐건만 흥) 다들 적당히 평범한데 또 우연과 운은 평범하지 않았다(누가 뭘 믿고 일억을 빌려주니). 화자가 그나마 섬세하고 민감하면서도 자포자기와 절박함이 막 뒤섞여 있어서 입체적이었다. 숫자가 오르락내리락 할 때의 심리 묘사나 토론방 반응을 대조하는 게 읽는 재미가 있었고, 이야기든 문장이든 주인공의 결말을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힘도 있었다.
5억 남짓 되는 돈을 만든 게 별 거 아닌 듯 보여도, 그걸 몇 달, 몇 주 만에 만들어 낸 건 마술 같은 일이다. 반대로 그렇게 5억 남짓 되는 돈을 잃는 것도 몇 분 몇 초만에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5억 가지고는 딱히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그러니까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내가 5억 남짓의 현금을 모으려면 앞으로도 몇 년이 더 걸릴 것이다. 소설 속 화자가 부모 집에 얹혀 살면서 학교도 때려치우고 다른 걸릴 것 없이 인생 모 아니면 도에 건 것처럼 나는 살 수가 없다. 나 자신을 비롯해 부양하고 돌봐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그래도 꿈은 꾼다. 수단이 무엇이든 10억이 모이면 나는 더 이상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방식의 노동은 안 할 것이다. 가끔 일용직 노동이나 규칙적이고 안정적이지 않은 적은 수입을 주는 노동을 하다 말다 할 것이라고… 웃기는 소리다. 퍽이나 그러겠다.
담배 냄새는 내 코가 익숙해진 건지, 이전 독자가 책 앞부분을 읽을 때만 뻑뻑대다가 읽다 만 건지, 재미있어서 불붙이는 것도 잊고 산뜻하게 다 읽어내려간 건지, 중고책의 히스토리는 궁금해도 알 수가 없다. 그건 몰라도, 모를 뻔했던 어떤 마음, 자신의 욕망을 어린 나이에 밑바닥까지, 하늘 뚫을 때까지 들여다 본 사람을 간접적으로 또 들여다 보는 기회는 나쁘지 않았다. 난 저 나이에 뭐했더라… 과외 아르바이트하고 교생 나가고 임용고사 준비하고 있었다. 초수는 떨어졌지만… 만원 짜리 아이라이너 하나 사면서도 물욕 물욕! 하면서 자책하고 살았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욕망은 내 선택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건지도 잘 모르겠다. 상황과 맥락과 관계 자체가 그냥 여기에 머무르라고, 거기까지만 바라라고, 혹은 더 바라라고 붙들어 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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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언젠가 미국이 그런 것처럼 한국도 코로나19에 뒤덮일 거라고, 이들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확진자 신세가 될 거라고 상상해 보았다. 그때가 되면 비난 여론은 존재하지도 않았떤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관람석의 무대로 자리를 옮긴 순간, 사람은 좋든 싫든 간에 남의 복잡성이 자신의 것과 동등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확진자들은 칠칠맞게 돌아다닌 모든 사람의 죄를 미리 대속하는 셈이었다. 일찍 운이 나빴다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때가 오기 전까지는 비난이 이어질 테고, 분위기가 바뀌더라도 선뜻 사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였다.(82, 내가 괴롭던 지점이었다. 내가 속한 자치구는 동선 공개를 열심히 하다가 지자체 공무원이 감염자가 되자 동선 공개를 일찌감치 중단했었다.)
-유가 폭락은 단순한 숫자놀음이 아니었고, 정말로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거대한 시소의 끄트머리에 선 느낌이었다. 한쪽에는 세계의 모든 고통이 모였고 반대편에는 그 고통을 발판 삼아 더 높이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101)
-단타 계약부터 청산하는 순간 세계를 뒤덮은 휘광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려서 그 부스러기가 내 품으로 날아드는 심상이 번뜩였다. 나는 헐떡이듯 웃기 시작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속삭임도 섞여 들렸다.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면 안 돼. 안 되는 거야? 왜? 어차피 그 사람들이 벌어 가면 내가 잃을 텐데?(180)
-“일단 인버스는 절대 사지 마. 인버스든 레버리지든 간에, 원자재 ETN은 절대 건드리지 말고 테마주랑 급등주도 하지 말고 안 망할 회사 주식만 사서 모아. 적금 들듯이 조금씩. 반도체 장비 쪽도 좋고, 2차전지도 모멘텀이 크게 올 거고…” (222, 완전 자기가 한 거 반대로 말해주는 거 착한 건가)
-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노동자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주가를 먼저 살피는 나쁨. 사람의 총체적인 가치가 소유한 아파트의 가격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믿는 나쁨. 모든 시장은 어떤 이유로든 다르게 나빴고 어떤 이유로든 똑같이 나빴다. (233, 선물쟁이 그것도 인버스만 줄창 타던 새끼가 갑자기 금융 시장의 윤리 쪽으로 눈을 돌리고 ‘뒤늦은 죄책감과 가닿을 곳 없는 후회’(232) 운운하는 게 좀 뜬금 없었다. 작품 시작부터 그런 조짐도 없었고 그냥 마비된 놈처럼 돈 따는 재미에만 반짝이던 애가 다 심드렁해지더니 훅 뭔 깨달음처럼 뻔한 소리를 했다.)
-나는 혹시 엄마를 내 욕망을 추동할 연료로, 최소한의 명분으로 삼아 왔던 건 아닌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처럼 언젠가는 엄마도 버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과학 걱정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위기감이 엄습했다. (…)
“나는 지금까지 누군가가 인형 뽑기에서 경품을 뽑듯이 나를 주워 들어서 출구로 보내 줄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그 누군가가 너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네가 나한테 그 화면을 보여 준 다음에도 그럴 리가 없다고, 지금까지의 기대와 약속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금방 배신당할 거라고 중얼거렸지.” (250-251)
-돈은 사실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가 될 수 있지요. 프랑스 철학자인 자크 엘륄의 말을 빌리자면 돈은 객체이기 이전에 인격적인 힘이자 권세의 존재양식이며, 돈으로 말미암은 현상들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권세란 아마도 욕망과 매매의 힘일 것입니다. (254, 작가의 말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