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2 베로니크 올미.
두꺼운 책 봤으니 좀 얇은 거 볼까 하다가 아무거나 집었다. 이 책은 어쩌다가 산 거야...절판 도서인데 굳이 찾다가 알라딘 우주점에서 가짜뉴스에 대한 책 사면서 아니 균일가 800원...배송료를 없애자...하면서 함께 담았던 기억은 있다.
구매 내역 뒤져 나의 ‘욕망’컬렉션들 뭐가 있나 찾아보니 이 책 말고도 이런 친구들이 있었다.
-몸, 욕망을 말하다 (읽었는데 망한 책)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욕망수업(종교인이 쓴 것 같은데 기왕 망한 거 뭐 나중에 읽어보자…)
-욕망의 진화(진화심리학 같은 거 은근 재미있게 읽었는데 욕하는 사람도 많던데 제가 한 번 보고 판단해 보겠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희곡이었나? 이건 읽긴 읽어야 겠다 얇잖아…)
-욕망(옐리네크. 내가 산 거 아니고 엄마가 오프라인 알라딘 가서 탐욕과 함께 구매하신 듯)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엄마랑 애기랑 여행기인데 이걸 제일 먼저 읽고도 멈추지 못하고 끝없이 책을 사려는 나의 욕망…라오스에 안 가서 그런 걸까...)
감독 갈 학교 예비 소집 회의에 다녀왔다. 어느 학교에 가는지 전날 자기 SNS에 인증샷 올려버린 어느 교사는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허허허… 나는 3년 전에 여기서 수능 봤었다는 것만 말하겠다. 작년에 수능 보고, 올해는 감독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했다. 없진 않겠지만 손에 꼽힐 것 같다.
아, A형 독감 앓고 이주가 지났는데도 비염 천식 이런 게 그 여파로 재발해서 기침 콧물이 엄청 심하다. 월요일날 내과에 다시 방문해 특단의 조치를 요청했더니, 좀 세다는 진해거담제, 항히스타민제도 주고, 집에 남은 흡입형 천식약도 밤마다 쓰라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자고 했다. 따듯한 물 마시고 사탕도 좀 빨아먹으라고… 약 열심히 먹어도 아직도 기침 나...시험장 가던 버스 중간에 서울대학생들이 우루루 몰려 탔는데, 갑자기 그동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기침이 발작적으로 폭발했다. 마스크 위에다 손수건 틀어막고 우웩거리면서 한참 기침하다가 창문 열고 숨 몰아쉬고 겨우 가라앉을 무렵 서울대학교 정문에서 내렸다. 아무래도 서울대학교 알레르기가 생긴 모양이다… 아니 저 어디 감독가는지 말 안 했음...관악산 단풍이 예쁘게 드는 중이다. 저녁 되고 좀 나아지는 느낌적 느낌인데, 부디 기침 발작 안 터지길!!! 이런 몸으로도 노역 가야 하는 운명의 데스티니!!!!
아마도 몇 년은 이렇게 더, 가을마다 수능 가까이에 갔다 오고, 한해 살이도 대강 어떻게 굴러갈지 감지하며(사소한 폭탄들은 미리 감지하지 못하지만 막연하고 불안하게 예감하며) 살 것이다. 3킬로 남짓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이제는 딱히 이루길 바라는 뭔가가 없어서 괴롭지도 기대되지도 않는 나날이라고. 대부분을 가졌으니 뭘 더 가지지 않아도 되겠다. (예를 들면 책!) 사는 곳도 관계도 모두 안정적이고 뭐 다들 내 주변은 착하고 그럼 내가 빌런일지도 모르는데 하여간에 그런 빌런이라도 다들 잘 챙겨주고 사이좋게 살고 있다.
얄팍한 소설은 다짜고짜 비를 맞으며 여자와 남자가 걷고, 공원에 앉아 있다가, 호텔에 들어간다. 둘의 관계는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둘이 눈먼 섹스를 하는 동안 잠깐씩 비친다. 둘은 5년 전 헤어진 이후 처음 만났고, 이전에는 부부였고, 아이도 둘이나 있다.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미쳐버렸고, 여자는 아이 둘을 데리고 떠났다. 지금 아이 둘은 여자가 재혼한 다른 남자가 데리고 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둘다 삶에 굴곡이 많다.
여자와 남자의 입맞춤을 첫키스라고 표현하고, 여자는 처음 대하는 남자를 보듯 새삼 새롭게 섹스를 한다. 거식증에 걸렸는지 음식을 거의 못 먹고, 구토를 하고, 그간 12킬로그램 정도가 빠졌다고 한다. 남자는 다리를 전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여자와 헤어진 후 그렇게 됐는지 나오지는 않는다.
식당에 가긴 했는데 뭘 하나도 안 먹고, 비 맞고 걷다가 공원에 앉고 입을 맞춘 뒤, 호텔에 가서 섹스를 하고, 잠시 나가서 스시집에 가서 스시를 먹고, 다시 호텔에 돌아와서 또 섹스를 하고 둘이 끌어안고 창문 열고 비가 왔다 말았다 하는 걸 보며, 바람 부는 걸 느끼며 그렇게 있다가 여자가 방을 벗어난다. 몇 줄이면 될 서사인데 이렇게 저렇게 야한 장면 묘사를 열심히 해 한 권을 만들어 놓았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세상엔 재회한 옛 인연들이 갑자기 다시 튄 불꽃으로 섹스를 하는 관계도 있겠다. 다만 나는 그렇게 다시 뭐가 튈 만큼 깊게 좋아하다가 오래도록 못 만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저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더구나 부모의 이혼을 생각하면… 엄마에게 혹시 아빠를 다시 만났을 때 같이 잘 일이 있을까? 묻기만 해도 엄청 무례한 느낌이 든다. 정신병자에게 달달 시달리다가 정신병자가 알콜중독자로 변신해서 또 달달 시달리고 폭력을 겪고 충격 받은 사람이 겨우 5년 세월이 지났다고 그런 장면들을 잊고, 새 사람 만나듯 욕망에 겨워 품에 안기는 건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성과학 마스터 클래스’ 책이었나, 거기서 맥락이 중요하다고 했다… 위험 신호가 켜지면 즐길 수 없는 여자 사람이 대부분… 남자는 어째서 헤어지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무해함을 풀풀 풍기며 여자가 혹하게 매력을 풍기게 되었을까...심지어 더 늙었는데…
이 모든 불만은 800원에 이 소설을 사서 고이 모셨다가 하필이면 지금 펼친 내 탓이며, 감독 쉬는 시간에 볼 책은 과학과 철학이 간결하게 정리된 물리학자가 쓴 ‘세계 그 자체’(노승영 선생님 번역)를 가져갈 예정이다. 맵고 쓴 것도 읽고, 욕지기 나오는 것도 읽고, 재미있는 것도 지루한 것도 읽고, 지적인 것도 감성적인 것도 다 읽고, 그게 아마도 남은 내 삶이다.
번역자 선생님이 ‘단순한 열정’이랑 ‘연금술사’ 옮기신 분이고, 이 작가 프랑스에선 나름 유명하다고 소개해놨지만, 프랑스는 그냥 뜬금없이 섹스하고 뜬금없이 죽이고 죽고 뭐 그런 영화나 책이 뜬금없이 인기가 있어서 아 그냥 그렇구나… 우리나라 야한 소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장르물로만 남았나… 세기말 언저리 소설들에서 찾아야 하나… 아니 뭣하러 찾냐 막상 읽으니 아 야하구나 하고 딱히 재미는 없는데… 하면서 안구 정화용으로 ‘올리브 키터리지’를 꺼내다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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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길을 잃고 헤맸고, 그녀는 그의 상냥함을 향유했다. 그 상냥함 때문에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모든 여자들이 주지 않은 것을 이 남자에게 준다는 그 비길 데 없는 오만함. (130)
-최초의 정신착란 발작 때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나를 독살하라고 시켰어. 당신은 나를 죽이고 싶어해. 당신은 내가 내 아이들 손에 죽기를 원해. 당신은 내 죽음을, 내 죽음을, 내 죽음을 원해. 당신은 내 죽음을 원한다고!(132, 아빠한테 두부에 독 타냐고 의심 당해 봐서 알 거 같은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