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참을 수 없는
그냥 착오.
반유행열반인  2025/11/02 21:28
  • 시차와 시대착오
  • 전하영
  • 15,300원 (10%850)
  • 2024-02-07
  • : 998
-20251102 전하영.


벌써 4년, 5년 전에 소설보다 시리즈와 젊은작가상수상집에서 전하영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를 읽었다. 영화 쪽 일을 했던 소설가라는 정도만 알았다. 단 한 편이었지만 작가의 소설이 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한 해 전에 사 놓고는 이제야 읽었다.

소설집 속 여성들은 예술 공부하러 유학 다녀왔지만 대개는 이것도 저것도 못되어 방황하는 중년 여성들이다. 예술가적 자의식은 있지만, 그게 밥도 명성도 못 벌어다주고 스스로 늙음을 자각하며 위기의식과 불안을 느낀다. 영화나, 미술이나, 소설에 삶을 바친 것 같지만 또 딱히 바친 것 같지도 않고 이렇게 되어 버렸군, 그래도 살아야지 별 수 있나, 이런 변주만으로 한 권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의 나와는 접점이랄 부분이 거의 없어서, 그나마 연배가 등장인물들보다 내 쪽이 약간 어릴 뿐 이쪽도 이제는 늙을 일만 남은 중년배인데, 나는 너무 가진 게 많은가, 속물인가, 공부하다 나 모르는 사이 훅 늙어서 청년에서 중년으로 스위칭 되는 걸 잘 못 느껴서 그런가, 나이에 대한 인식마저 결국 겹치거나 공감되는 부분을 못 찾았다.

이건 내가 이 소설을 사 놓고 일년만에 펼친 시차 탓도 아니고, 작가가 시대착오적인 이상을 품어서도 아니고, 오히려 어느 시기의 마스크 빼고는 대부분 소설이 시대성을 담고 있다고도 말하기 힘들다. 좋게 말하면 아무 시대에나 들어맞을 수도 있겠지만 이 시대에도 다음 시대에도 나에게는 맞지 않는 소설…
그냥 책을 잘 못 고른 나의 착오일 뿐이다.

밴드를 한다고 깝치고 다닌 적도 있고, 소설을 쓴다고 또 한참 습작하며 좋은 글을 이뤄보고 싶은 꿈도 꿨던 적이 있지만, 대학에 다시 가겠다고 녹슨 머리 굴려가며 지키던 책상머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회한 같은 건 없다. 그냥 딱히 뭘 한 게 없는데 무언가 되어 있는 느낌이고 독감에 걸린 것 빼면 대체로 삶에 만족한다. 내 시간과 노동을 갈아 돈을 조금이라도 계속 받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예술은 품이 들지만 그게 돈이 되고 남들의 관심을 받고 사랑받고 계속해 나갈 만큼 동력을 얻기가 정말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일들을 오늘도 계속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은 거 어쩔 수 없죠. 힘내십쇼.

+밑줄 긋기
-왜 모든 것이 적당한 장소에 제대로 존재해주지 않는 것인지, 언제나 의문이었고, 대개 인생은 그렇게 흘러갔다. (93, ‘영향’ 중)

-“언니, 제 목표가 뭐냐면요. 약까지만 가는 거예요. 만약 미쳐서 약을 먹더라도, 남들한테 민폐 끼치지 않고 살려고요. 그게 제 목표예요.”
“아까는 결혼이라며?”
난희는 주방 찬장에 얌전히 포개져 있을 자나팜정을 생각하며 물었다. 자나팜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질 때마다 하나씩 먹으라며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었다.
“그건 단기 목표고요. 결혼도 하고 미치지도 않기.” (101, 그게 목표로 삼는다고 되는 건 아니란다...당신 옆의 미친년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아니 뭐 저 정도야 실례 정도일까, 하여간에 약은 나쁜게 아니란다. 남들한테 민폐 끼치지 않고 살려고 애쓰는 수단이기도 하단다.)

-그들은 어딜 가나 눈길을 끄는 커플이었다. 매번 호기심어린 시선이 따라다녔다. 그들의 일반적이지 않은 나이 차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곤혹스러운 것이었던 모양이다. 편협함은 늙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팔짱을 기고 가다가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그 눈길이 때때로 위협적일 만큼 집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숙희는 마치 찬영의 친누이, 혹은 막내 이모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서 반걸음 떨어져 성적인 뉘앙스를 탈락시킨 채 무감하게 서 있곤 했다. 숙희는 나뭇 조각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을 끌지 않으려 노력했다. (137,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중, 편협함은 늙은이보다 늙지 않은 이들이 더 강력하게 발휘한다는 것... 적어도 난 그랬다)

-숙희는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출산과 육아의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감히 그런 꿈을 꾸고 앉아 있었을까. 인간이라면 마땅이 누려야 하는 권리라도 되는 듯이. 엄마가 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만으로도, 개인으로서의 한 여성이 이전에 누렸던 거의 모든 삶의 지분을 빼앗기는 그런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도. (140, 빼앗기는 것도 많지만 쥐콩만큼 쥐어주는 것도 있긴 함. 저걸 언제 다 키우냐 하는 측은한 눈빛 같은 거. 나한테 주는 건 아닌데 애한테 주는 호의 같은 거. 예전엔 다들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부모가 되라고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뭐라도 알려주면 대부분 부모가 되는 걸 거부할 것이기 때문에 안 알랴줌 이었던 걸 뒤늦게 알았다. 인류가 이만큼 번성했던 건 대부분의 인류가 무지했기 때문이고, 만약 인류가 쇠락 멸종한다면 이젠 다들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잃은 것은 석 달 치 월급. 그녀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주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 둘째, 예술 너머에는 거대한 ‘진짜’ 세상이 존재하며 대다수의 인간은 예술이 아닌 돈에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뼈아프게 다가오는 사실은, 그런 속물적인 욕망에 관한 한 자기 자신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 더이상 예술만으로 만족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없어졌다는 것. (189, ’시차와 시대착오‘ 중. 돈은 힘이 세다. 미친 예술을 이길 만큼. 예술이 이기고 돈이 될 즈음 우린 이미 다 죽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한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엄마가 집을 떠났다는 사실을 재차 상기하며 기뻐하는 자신을. 그 여자가 집에 없어. 그 여자는, 이제 정말 집에 없다! 엄마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척, 무척 슬펐지만 안도했다. 그리고 미루는 죄책감을 느꼈다. 할부로 슬픔을 나눠 갚듯이 천천히, 차곡차곡, 그것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어떤 희생으로부터 현재의 삶을 얻어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빛나는 삶, 자유로운 삶, 먼 곳에서의 삶. 엄마가 살고 싶었던 그 삶을 자신이 대신 누리는 것. 엄마가 동경했던 어느 외국영화 속의 젊은 서양 여자처럼. (204, 미루보다 조금 더 일찍 자랐던 나는 아빠가 집을 떠난 뒤에도 늘 불안했다. 언제 이 사람이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 불길. 죄책감 없이 슬픔 없이 남은 삶을 잘 살 자신이 있지만 부고는 들리지 않고… 미루에게 야 넌 사장님이 최저시급도 안 주다가 최저시급으로 올려줬다고 사장님 어떡해 망하면...할 사람이로구나 하고 정신차리라고 하고 싶다.)

-우습게도 그 순간 미루는 자신이 준회와의 관계를 더 이어갈 수 없었던 이유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때, 평범하고 행복했던 어느 날들에, 작은 다툼을 끝낼 때마다 그가 미루에게 장난삼아, 작은 동물을 대하듯 그녀를 귀여워하며 “정신 나간 여자 같으니”라고 말했던 것. 아무런 악의 없이 반복되었던 그 말.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그것. 바로 어머니의 세계에 속해버리는 것.

망상.
미루는 일생에 한 번은 환청을 듣거나 환각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예감을 안고 살아왔다. 그것은 몸안에 흐르는 잠재된 가능성으로서 항상 그녀를 괴롭혀왔다.
(205, 그래, 나 미친년이다 끼야야악- 이런 나라도 계속 사랑해 줘. 나라면 뉴욕으로 숨는 대신 그랬을 거다.)

-아버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다는 건…...아무 느낌도 아니군요. (237, ‘경로 이탈’ 중. 별 거 있을 줄 알았냐)

(오 밑줄 긋기 다시 읽고 보니 ‘미친년’이라는 주요한 교차점을 놓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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