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5 윤덕원.
윤덕원의 노랫말을 좋아했다. 좋아한다, 라고 하지 않는 건 김미월 선생님의 소설에서 고백은 과거형으로 하라고 하셔서 그냥 한 번 해 봤다.
머리를 긁적이며 학생회관의 밀크셰이크를 들고 멀어지는 뒷모습, 민중가요 노래책 한 페이지에 아침 면도로 벤 자리에 붙였던 걸 옮겨 붙인 지저분한 반창고(하필이면 아침이슬에다), 빡빡이 머리를 하고 잔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밥도 안 먹고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구석 자리…
적어두지 않아도 휘발되지 않던 주변 이들에 대한 어떤 기억들이 너무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 지인들은 자기 동생 이름이나 생일까지 외우고 있는 나를 파묻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흑역사 녹음기 같은 넌 죽어라, 하고.
그런 반짝이는 기억력은 유효기간이 있었다. 흐릿하고 희미해진 걸 깨닫고 나서야 아 내가 뭘 잃었구나, 잊었구나 싶었다. 그나마 적어둔 흔적들을 찾았을 때, 내게 이런 일과 기분이 있었구나, 그러고는 또 잊는다.
아마도 잊을 건 다 잊고, 나머지를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일기 같은 글들이어서 생각보다 잘 읽혔다. 노래를 쓰고 글을 쓰고 그걸 입에 올리는 사람의 글과 생각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제목의 대충은 어떤 다짐 같이 느껴졌다. 완벽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읽는 이들을 다독이는 말로 대충을 써 먹을 수도 있구나. 계속 쓰고 부르는 사람으로 삶을 이어가는 게 존경스럽고, 앞으로도 오래 그런 사람으로 잘 해내가길 기원했다.
+밑줄 긋기
-
얼마나 세심하게 글을 다듬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되 읽을 만한 글도 참 많다.
-
하지만 때로 기억은 엄청나게 힘이 강하기도 하잖아? 그때를 증명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누군가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떠오르는 일이 있는 것처럼.
-
조금이라도 어색할 수 있는 표현을 곱씹어보고, 다른 입장에서 어떻게 들릴지 예상해서 뺄 수 있는 표현을 최대한 삭제한다. 함량 미달의 단어를 더 채워 넣느니 차라리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사의 밀도를 높인다. 노래가 일종의 기원이나 주문(呪文)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
“이번이 저의 마지막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끝은 차라리 아름답다. 그러기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더 해보기 위해서가 아닌 마무리하기 위해 남은 역량을 투입해야 하니까.
-
아름다운 울림을 지닌 단어는 많지만 노래에 담고자 하는 의미는 필연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움츠려야 한다.
-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변명만 늘어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은 영영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가능성을 파괴해가면서.
-
처음에는 더 좋은 결과물을 얻고 싶다는 순수한 욕심에서 새로운 장비와 악기를 사기 시작했더라도 어느 시점 이후에는 더 비싸고 좋은지와는 별개로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해지는 것 같다.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작업과 연습 과정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쳐갈 때, 새롭게 만난 매력적인 기기들과 친해지는 과정은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꼭 필요하지 않은 악기를 살 때도 많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어떤 기타를 구매해야 하나요?” 하는 질문에 “모양이 마음에 드는 것을 사세요.”라고 답하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
잡지를 둥글게 말아서 비닐 포장을 뜯어낼 때 나는 새 책 냄새를 맡으면 아무리 울적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최고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에 이런 확정적인 행복이 주기적으로 있으면 빡빡한 날들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된다.
-
레코딩을 하면서 마이크를 자주 다뤄본 경험은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가창력과는 상관없다…….) 마이크의 작동 방식이나 원리를 안다면 같은 환경에서도 더 좋은 소리를 입력할 수 있다. 녹음할 때 얼굴을 어느 위치로 이동하면 목소리 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
완벽하지 않은 채로 발표된 노래가 계속해서 불러주는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것처럼, 조금 느슨한 마음으로 오래 곁을 지켜 서서히 완성하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