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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 양안다
  • 8,550원 (10%470)
  • 2020-03-30
  • : 577
-20250404 양안다.

우연히 예전에 소설 강의 듣던 문화센터 커리큘럼을 살피다 오, 양안다 시인이 이제 여기서 시를 가르치는구나, 나 다니던 때는 황인찬 시인이 강좌를 했었는데. 나의 원탑 투탑 시인들은 이래저래 열심이구나. 아주 잠시 시 강의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기초반은 평일 열한시야...그리고 나는 시를 써 본 적도 시를 쓸 생각도 없다. 그럼 다시 소설을? 하다가 아직은 쓰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걸...당장은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어...아무 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 하고 싶어… 했다.

작년 4월에 나온 양안다의 산문집을 읽는 중인데, 5년 전 나온 시집이 어쩌다보니 끼어들었다. 시각장애인 복지관에 딸려 시각장애인 바리스타가 음료를 만들어주는 카페를 좋아한다. 음료가 싸고 맛있다. 작은 도서관이 연결되어 있는데, 점자 책도 제법 있고, 아르코 나눔 도서 선정된 책들도 비치되어 있다. 언젠가 그 책들을 훑다가 이 시집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그 시집을 다 읽을 때까지 딸기 말차 라떼를 쭉 빨아 먹는 것이다. 자주 보이는 어르신의 목소리를 벌써 익혔다. 다른 시각장애인들과 안부를 나누고 안 보인지 몇 년차인지, 복지관에서 무슨 활동을 하는지 (헬스도 하고, 드럼도 치고, 이렇게 친교활동도 하고) 서로 묻고 답한다. 의사소통을 목소리에만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한다. 비언어적 단서가 없으니 어투에 담기는 표정도 조심스러울 것 같다. 그래서 다들 말을 유독 곱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좁은 공간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틀어두고는 있지만 말을 또렷하게 크게 하며 나누는 대화는 저절로 귀에 꽂힌다. 그러면서 시를 읽고 있으니 시인에게는 건성으로 읽었냐! 하고 미안할 일일까…

이 시집은 이전에 읽었던 최신 시집들보다 조금은 덜 난해했다. 주제도 일관되어서 연작 시 보는 느낌도 들었다. 망한 세상이라도 너, 라고 할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난 덤덤히 망함을 받아들일 것 같은데. 너, 가 망함에 너무 빠져 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다면 또 슬플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시들을 읽을 때는 눈뜨고코베인의 노래 두 곡이 떠올라서 한 번씩 들어봤다. 마음에 드는 시들을 통째로 아니면 조각으로 옮겨 적었다. 여기에다 산문집(시의적절 시리즈는 시도 섞여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하이브리드 시집 쯤 되겠네)까지 이달 안에 읽으면 나 양안다 팬 맞지 않냐…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 양안다의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이렇게 두 권만 사둔 채 안 읽고 있는데, 민음사에서 나온 밀란쿤데라의 ‘커튼’도 그렇게 묵히다가 할배 돌아가시고 나서 읽었는데 이건 뭐 내가 쟁인 시집 읽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내 곁에 너, 들이 끝까지 우리, 라고 말해준다면.

https://youtu.be/72gnaqACh6k
내년엔 납골묘를 만들어
여기저기 흩어진 묘들을
이장할 생각이다
그래야 너희들도 편하겠고
나도 죽기 전에
그것만은 하려고 한다

아버지 납골묘 아래에
내가 먼저 들어갈 건데요
(눈뜨고코베인 ‘납골묘’ 가사 중. 위의 영상에는 건강하던 시절의 내 친구가 드럼을 치고 있어서 조금 슬펐다.)

+밑줄 긋기
-이 밤을 사랑하는 건 신과 우리 뿐일 거야. 세계가 망가지는 건 우리와 무관한 일.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서사에 전념하면서. 모든 게 기울어지고 있어. 어쩌면 너의 눈앞에서 춤추던 내가 쓰러질 수도. (‘영원한 밤’중)

-우리가 그곳으로 향할 때. 끝나지 않는 눈길을 걸으며. 어떤 빛을 발견하기 위해. 나는 생각했어. 우리에겐 집이 필요해. 낙하산과 에어백, 혹은 울타리라는 이름의 노래와 발목에 묶을 밧줄. 나는 누군가의 마음으로 추락하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네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눈의 비명을 들었다. 우리는 하얗게 질리도록 걸었지. 숨쉴 수 있거나 숨을 수 있는 곳으로. 지평선을 향해 점으로 작아지면서. 무한해. 지평선은 닿을 수 없이 멀어지고. 우리는 무한한 발자국을 남기고 눈보라는 우리의 발자국을 지우잖아. 너의 입김은 어느 설국에서 부르는 노래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줄게. 너를 만나기 전의 일. 그러니까 내가 지금보다 작고 작은 영혼이었을 때. 그때 나의 마음은 그저 투명했다는 생각. 물을 만지면 푸른색에 잠기고 꽃밭을 걸으며 총천연색으로 물들기도 했지. 지금은 마음을 잘라 단면을 살펴보아도 핏빛이다. 그때 꾸었던 꿈과 지금의 꿈은 왜 다른 걸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듣고 있어? 우리가 그곳에 도착할 때. 그곳에는 집, 낙하산과 에어백, 울타리라는 이름의 노래와 발목에 묶을 밧줄조차 없을지라도. 표현할 수 없는 공허. 혹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불. 갈증을 삼키려 퍼먹던 한 주먹의 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게. 듣고 있어? 아직 잠들기 이른 시간이야. 너는 두 눈을 옆으로 길게 찢으며. 웃었지. 나는 너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눈을 감지 말라고.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전문)

-다음엔 새가 되고 싶어. 너는 말했다. 새가 되면 가장 높은 나무만 골라 앉을 거야. 흔들리는 나무를 찾아오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저 멀리 숲길을 걷는 아이들이 보였다. 문득 비가 쏟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말했다. 너는 불이 되어야 해. 불이 되어서 가장 높은 나무만 골라 태워야 해. 내가 널 찾지 못하도록.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 꿈에서 나는 타오르고 있었다. 불 속으로 날아드는 새가 보였다.
(’암전‘ 전문)

https://youtu.be/j0dI6Iz7_XA
세상은 너와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유로)
폐업을 선언하고 모두
사라져버렸네 (남았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고)
세상엔 우리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옷을 벗기 시작했네
(…)
아주 오래된 약속
아주 오래된 맹세
너와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있었던
그 약속을 기억해볼까
아주 오래된 약속
아주 오래된 맹세
너와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있었던 그 이야길 반복해볼까
(눈뜨고코베인 ‘종말의 연인’ 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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