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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 [전자책] 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 10,500원 (520)
  • 2020-11-16
  • : 5,758
-20210228 김소영.

성탄절을 앞둔 교회 안은 추웠다. 성가대 연습 중 (성가대 지휘하던) 피아노 선생님의 어린 조카가 놀러왔다. 동그란 눈에 포동포동 귀여운 아이 목에 익숙한 목도리가 걸려 있었다. 어, 저건,
내 거예요.
남색 면으로 된, 상표까지 내 것이었다. 겨우내 아끼며 매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서 너무 섭섭했다. 내가 피아노 학원에 두고 왔구나, 그걸 저 아이가 매고 왔구나 싶었다. 말 없이 한동안 잠자코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네가 그렇다고 하면 네 거 겠지.
선생님은 조카의 목에서 목도리를 풀러 내게 건네주었다. 열두 살의 나는 대여섯 살 아이가 올 때보다 춥게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 그저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기쁨에 신이 나서 연습을 마치고 목도리를 두르고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친구네 집에 갔더니 친구가 옷장을 열고 내 목도리를 내밀었다. 저번에 놀러왔다가 두고 갔다며. 재질과 상표는 같았지만 내 목도리는 남색보다는 남보라색에 가까웠다. 그걸 친구네 집에서 찾은 뒤에야 알았다. 집에 돌아와 두 개의 목도리를 나란히 걸어 놓고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런데도 끝내 목도리를 선생님께 돌려주지 못했다. 아직은 어리고 어리석었다. 내가 틀렸었다는 걸 밝힐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이십오 년이 흐른 지금까지 부끄럽다.
피아노 선생님은 그렇게 나를 처음 믿어준 어른이었다. 그뿐 아니라, 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내게 추가적인 수업료를 받지 않고도 시간을 내어 특별 레슨을 해 주고, 자장면을 사 주고, 피아노가 없는 내가 언제든 원하면 연습을 하러 오라고 주말에도 학원을 열어주셨다. 단순히 피아노만 가르치지 않고, 청음과 음악 이론까지 상세히 가르쳐준 뒤 문제를 다 맞추면 아이들에게 백점 맞은 개수만큼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라고 동전을 쥐어주셨다. 나는 주먹 한 가득 이걸 다 받아도 되나, 걱정하면서도 학원 아래 있는 슈퍼로 뛰어내려가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을 마음껏 사 먹었다. 여름방학 때는 희망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안보 와이키키 온천으로 여름캠프를 가기도 했다. 대부분 엄마아빠가 일을 하느라 여름휴가를 떠날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이었는데, 적은 비용만 받고 다른 친한 피아노 선생님을 섭외해 봉고차를 대절해 내려가서 놀이기구도 태워주고, 수영장도 데려가고, 아이들을 씻기고 머리도 묶어주고 일일이 다 챙겨주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렇게 아이들을 챙기고 돌보는 일이 보통의 마음으로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고마운 분이었는데 내가 조금 자라면서 피아노 치는 게 조금씩 재미가 없어졌고 어느날부터인가 흐지부지 학원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뒤늦게 선생님이 결혼할 예정이고, 그래서 지방으로 이사를 가신다는 소식에 슬퍼하면서 학원(겸 선생님 숙소, 어느 때부터인가 건물 임대가 끝나면서 선생님이 사는 빌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에 찾아갔다. 선생님은 외출해서 안 계시고 선생님 어머니만 집을 정리하고 계셔서, 엄마에게 졸라 준비해간 선물(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로 기억한다)을 건네고 아쉬워하며 돌아오던 기억이 난다.
내내 자존감이 낮은 삶을 살아왔지만,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른이 내가 힘들어하면 위로해주고, 내가 잘 하고 싶었던 피아노 연주를 잘할 수 있게 독려해주고, 어린 아이가 누릴 만한(주전부리부터 여름캠프까지) 것들을 챙겨주었던 경험은 아직까지 마음 한 구석을 덥혀준다.
덕분에 아이들을 대할 때 존댓말을 하고, 어른 대하듯 말을 걸고, 한 번이라도 아이들을 웃기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는 어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남의 아이들에게는 조심스럽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모진 때도 많아서 십 년 내내 반성하는 못난 어미이긴 하지만...ㅠㅠ 김소영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읽으며 피아노 선생님이 내내 생각났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계셨으면 좋겠다. 지방에 가서도 나 말고도 다른 아이들도 많은 가르침 받았다면 정말 좋았겠다 싶다. 그런 어른들이 많은 세상이라면 가족 안에서 상처 받고 주눅들어 있던 아이들도 내가 그렇게 못난이는 아니라고, 나도 저런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크게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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